마음이 전부인 일
돌아보니 어느덧 프리랜서 생활도 십 년 차다. 올해 초, 모종의 이유로 이력서를 업데이트할 일이 있었는데, 그간 해온 일들을 연도별, 카테고리별로 정리하다 보니 한 줄 한 줄 문서를 채울 법한 양이 된다는 것에 조금 놀랐다. 늘 그때그때 수습하듯 버티고 해내온 일들이 한 페이지에 정연하게 기술되어 있는 걸 보니, 마치 그 일들을 꽤 말끔하고 가뿐하게 완료한 것 같았다. 개중에는 진정 울며 겨자 먹기로 했던 프로젝트도 있었고, 이걸 경력에 포함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마음을 주지 않은 일도 더러 있었는데. 마냥 잘했다고 떳떳해질 수 없는 일도 있었는데. 마음이 더 기운다고 해서 일의 성과 또한 그 비슷한 기울기로 상승곡선에 머물렀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소설을 쓰는 게 본업인 사람으로서, 내가 쓰는 소설만큼은 마음으로부터 발진하는 추동력이 무엇보다 중요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바. 그러나 때때로 그러한 마음가짐이 다른 일을 대하는 태도에조차 영향을 주기도 했다. 마음이 동하지 않아 일을 그르치거나, 굳이 거절할 필요 없는 일을 내 마음속 상시적이고 요란하기 그지없는 기준들로 인해 끝내 못하겠다고 무르기도 했다. 지금에 와서는 정말 왜 그랬나 싶은. 아마도 일 앞에서 너무 긴장했거나, 아님 일 앞에서 너무 건방졌거나.
그러나 일은 일이다. 이쯤에서 돌아보니 나는 이제야 일은 일일 뿐, 이라는 아주 간단한 명제에 도착해 있다. 내가 정한 기준은 딱 두 가지. 1. 살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한다. 생활의 항상성을 유지할 만큼의 적정한 벌이를 할 것. 2. 무슨 일이든 하되, 내키지 않은 과정과 방식이 발생한다면 최대한 잘 조율할 것. ※금기사항: 중간에 못 하겠다고 무르거나 엎어버리거나 뛰쳐나오지 말 것. ※예외: 일이 나를 괴롭히거나 망치게 되는 시간이 지속된다면 당장 빠져나와 숨 고르기를 할 것. 내가 너무나 소망하고 염원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쫌쫌따리한 경력들이 내 생애 연보에 엄청난 과업으로 기록될 리 만무하다는 것쯤은 전기에 흠뻑 빠져 살던 유년 시절에도 일찍이 깨닫고 있었던 지라(어째서 이 위인 선생님들에겐 전기에 쓰일 법한 에피소드들이 이리도 많은 걸까? 늘어지게 낮잠을 자거나 뱃머리에 앉아 물멍을 때리거나 딴 생각으로 하루를 공치거나. 그런 날들은 왜 적혀 있지 않은 건지 늘 궁금했다. 그러다가 자연스레 소설을 읽게 되었지…), 더욱이 만 27살을 넘긴 시점부터는 타락은 나락이 되고, 방종은 민폐가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생활인으로서 일정한 균형감을 지니며 산다는 것은 그 무엇보다 어려운 필생의 과업이라는 것도.
일과 마음의 균형도, 갈피도 잡지 못하고 번번이 마음의 부침만 커져가는 나날이 내게도 있었다. 누구도 말리지 않았지만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자주 주저하던 날들. 이번이 아니면 나는 완전 끝이야, 의 심정으로 지나치게 온 마음을 다해버리다가 너무 빨리 닳아버리던 날들. 힘 조절을 못해 엇나가고 꺾여 결국 부러진 연필심을 속절없이 바라보다가 울어버리는 날들. 그럴 땐 내가 있는 시공간보다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많이 떠올렸다. 지형적으로도 이곳이 아닌 멀고 먼 저곳에 살았거나, 아니라면 이미 이 별을 떠난 사람들을 자주 궁금해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물었다. 도대체 당신은 이 일을 그렇게나 오랜 세월 할 수 있었던 거죠? 매너리즘에 빠지거나 생활고에 빠지거나 둘 중 하나인 이 일을 어떻게 그렇게 끝까지 해내신 거죠?
트윗 하나로 쇼에서 방출된 코미디 작가 에이바는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뛰어내리는 게 낫지 싶은 심정이다. 대출로 끌어서 산 집의 이자를 내기 위해서라도 에이바는 당장 일을 구해야 한다. 급한 불을 끄거나 어떻게든 막아야 하는 ‘당장’의 상태에 놓이게 되면 당연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고를 여유 따위는 없다. 에이바는 결국 그녀의 에이전시 소속 연예인이기도 한 스탠딩 코미디언 데보라의 쇼 구성을 맡기 위해 라스베가스에 가게 된다. 한물간 코미디언의 낡고 낡은 레퍼토리를 보좌하기 위해 한 카지노 호텔에서 기거하게 된 에이바는 자신의 업적 행보가 완전히 말리고 망해버렸음에 낙심한다.
굵직한 TV쇼에 크레딧을 올리며 신선하고 산뜻하며 시의적이고 한 방이 있는 작품을 써서 에미상을 수상하는 삶. SNL의 티나 페이가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의 쇼를 만들어 구성과 연출은 물론 직접 배우로 출연까지 하는 삶. 그러다가 에미상과 같은 저명한 어워즈의 호스트까지 되는 삶. 그녀가 고향을 떠나 LA에 있는 집을 매매하며 품었을 청사진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정한 방향과 그 방향에 놓여 있는 거점들을 한 곳씩 확보하고 제대로 도달하는 것. 거점을 한 곳이라도 확보하지 못한다면, 다시 말해 주어진 코스를 밟아나가지 못하고 삐끗하거나 돌아가게 되는 일이 생긴다면, 그건 실패일까? 에이바는 현재 제멋대로 굴러가고 있는 인생이 실패로 귀결되고 있다는 착오에 빠져 있다.
그런 그녀에게 데보라는 자신의 트랙과는 전혀 다른 궤적을 품고 살아온 선배처럼 보인다. 수십 년의 커리어를 지녔지만, 네임드들이 으레 하는 이미지 메이킹은커녕 지역의 소규모 피자 가게에서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광고 사진을 찍는 데보라가 에이바는 이해가 되질 않는다. 새로운 것보다 먹히는 걸 하는 게 우리 일이라며 비슷한 레퍼토리를 우려먹는 것도 싫다. 그녀가 가볍게 내뱉은 비하와 혐오의 시선이 깃든 농담은 다원화된 정체성을 수용하려는 시대적 감수성도 못 따라가는 옛날 사람의 모습을 고스란히 탑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요즘은 농담도 못해, 하며 우스갯말로 눙치는 것조차. 특히 데보라가 처음 스탠딩 코미디를 시작했던 시절, 쇼에 서기 위해서 감수해야 했던 부당한 일들에 대해 전면에 나서 고치려 들지 않고 묵과했다는 것에 에이바는 그녀에게 실망한다. #MeToo 운동이 자신의 커리어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에이바로서는 업계의 지독하고 고질적인 문제를 유산처럼 물려준 데보라가 선배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은 거나 다름없었을 터. 그러나 그 유독한 시절을 어떠한 버팀목 없이 홀로 통과한 데보라에게 직접 겪어보지도 않은 에이바의 질타는 같잖기만 하다.
굿 이즈 더 미니멈. 자신은 글을 잘 쓴다고 말하는 에이바에게 데보라가 건넨 말이다. 잘하는 건 기본이라고. 그냥 잘하는 게 아니라 훌륭한 실력이 될 만큼 악다구니로 해야 한다고. 게다가 나만 잘하면 되는 게 아니라 운도 따라줘야 하는 거라고. 그녀는 덧붙인다. 정말 힘든 게 어떤 건지도 모르면서. 젊은 시절, 여성 코미디언 최초로 레이트나이트 쇼의 호스트가 된 데보라는 남편의 외도로 인해 질투에 눈이 멀어 자신의 집을 방화했다는 루머로 인해 쇼에서 급작스레 퇴출당한다. 싱글맘으로 최선을 다해 살아왔지만, 그녀의 딸은 엄마에게 제대로 된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해 수년째 상담 치료를 병행해오고 있고, 엄마로부터 재정적인 독립을 하려 사업을 벌이면서도, 부유한 스타 엄마의 후줄근하고 못나 보이는 사진을 파파라치에게 팔아 수익을 챙긴다. 칠십 년을 살아온 베테랑 현역 코미디언 여성에게 ‘운’은 어떤 의미일까. 자신이 정한 방향에 놓인 거점들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딛는 것. 그 트랙은 과연 가능하긴 한 것일까?
에이바는 데보라의 곁에서 그녀가 살아온 트랙의 모양을 찬찬히 살핀다. 오점과 맹점이 곳곳에 수렁처럼 잠복해 있으나, 길고 멀게 보면 그 수렁이라는 것도 그저 얕아 보이게 되는 작은 물웅덩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에이바는 머지않아 깨달을 것이다. 그 진귀한 경험. 단거리 달리기 기록을 묻는 것이 아니라, 오래 달려본 사람만이 아는 페이스에 맞춰 같이 달려보는 것. 휘둘리며 가빠지지 않고, 내가 편한 방식대로 숨을 고르고 내쉬는 방법을 모색하는 요즘의 나로서는 에이바의 라스베가스 행이 질투가 날 만큼 부럽기만 하다. 물론 앞서 말했듯 일은 일일 뿐이다. 데보라가 마냥 꼰대짓을 하며 수발을 들라고 명한다면 근로계약서의 이행 조건을 다시 보겠지만. 그럼에도 어떤 일은 마음이 다하는 경우가 있으니까. 그리고 마음이 전부인 일도. 두 사람에게 코미디가 그렇듯, 내게 소설이 그렇듯이.
OTT 왓챠
원제 Hacks
출연 진 스마트, 헤인 아인바인더
시놉시스
올드하다며 퇴출 위기에 놓인 전설적인 스탠딩 코미디언 스타 데버라. 트위터에 올린 농담 때문에 일자리를 잃은 작가 에이바. 막다른 길에 몰린 두 사람은 내키지 않지만 한 팀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