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렛>(2012)

최근에 식물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 내 손으로 직접 화분을 들인 건 처음 있는 일이다. 어릴 적부터 나는 식물과 함께 자랐다. 오랜 기억 속 볕이 잘 들던 우리 집 베란다에는 재물을 불러온다는 행운목부터 관상용 난초 화분, 커다란 잎사귀의 고무나무까지 다종다양한 식물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베란다는 장난기 많고 덤벙거리는 어린애들은 감히 들어갈 수 없는 성역 같은 곳이자, 엄마의 작은 정원이었다.

그러나 엄마는 식물을 잘 기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베란다는 갖가지 채도의 초록색들로 가득했지만, 묘하게 생명력을 잃은 느낌이었다. 정원 주인이 없는 오후, 혼자 몰래 베란다에 잠입하면 나던 냄새가 기억난다. 어딘가 축축하고 마냥 좋지만은 않은 냄새였다. 식물들이 광합성을 몰아서 하는 한낮에 엄마는 일하느라 집을 비울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사람 자식이나 식물 자식 모두 알아서 끼니를 챙겨야 했다. 퇴근한 엄마는 늘 사람 자식에게 밥 먹었느냐고 물었다. 식물 자식들에겐 물어볼 수가 없으니, 엄마는 마구 물을 주는 것으로 애정을 표현했다. 돌이켜 보면 엄마는 식물에 끊임없이 뭔가를 주고 있었다. 날마다 화분의 자리를 바꿔가며 바닥이 흥건해지도록 듬뿍 물을 주고 영양제를 꽂았다. 햇빛에 노출된 시간에 따라 물을 주는 주기가 매번 달라져야 한다는 걸 나는 이번에야 제대로 알게 되었는데, 미안하지만 엄마는 지금도 잘 모르는 것 같다. 식물과 함께 볕을 느껴가며 일조량을 가늠하기. 식물 자식에게는 그게 가장 필요했을 텐데. 그건 사람 자식이 원하던 것이기도 했다.

재작년에 먼저 고양이 별로 떠난 밍가는 초록색 이파리만 보면 냅다 입부터 갖다 대는 호기심 많은 고양이였다. 그런 이유로 언제부턴가 식물은 내게 안전하지 않은 것, 위협적인 것이 되었다. 잘 키우지도 못하면서 자꾸 집에 화분을 두려는 엄마와 자주 충돌을 빚던 이유이기도 했다. 엄마는 나와 상의도 없이 크고 작은 화분을 들여왔고, 그때마다 나는 고양이에게 무해한 식물인지 확인한 후 집에 둘 것과 내보낼 것을 솎아냈다. 그 소모적이고 지난하기만 한 실랑이를 몇 번이나 치르고도 엄마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엄마가 밍가를 붙들고 사람의 언어로 나뭇잎을 뜯지 말라고 훈계하는 걸 보고 있자면 머리가 지끈거렸다. 가능하다면 지독한 영역 동물인 녀석을 그냥 데리고 다니고 싶었다. 보호자와 함께 다니는 개들처럼. 24시간 꼭 붙어 다니며 온갖 위협적인 것들―이를테면 해롭기 짝이 없는 요괴 식물들―로부터 지켜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지금은 의미 없는 얘기다.

<스타렛>(2012)

작은 치와와 스타렛은 제인이 가는 곳마다 함께 한다. 제인의 고향인 플로리다의 잭슨빌에서 캘리포니아의 샌 페르난도 밸리까지는 약 4,000킬로미터. 차로 움직여도 꼬박 하루 반나절이 넘게 걸리는 머나먼 곳으로 제인은 떠나왔다. 친구 집의 작은 방 한 칸이 제인과 스타렛의 임시 거처였다. 그곳에 언제까지 머물게 될지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지만, 사는 동안만이라도 자신이 점유한 공간을 그럴듯하게 꾸미기 위해 제인은 중고 물건을 사러 다닌다. 집 마당과 차고에 늘어놓은 오래된 물건들 사이를 걷는 동안에도 스타렛은 제인의 품에 안겨 있다. 제인이 새디로부터 화병인지 보온병인지 모를 물건을 살 때에도. 화병인지 보온병인지 모를 물건은 얼마나 오래된 물건일까. 얼마나 오랫동안 새디의 집에 있었을까. 입구가 좁고 긴 그 물건 속에 돈이 얼마나 들어 있는지도 모를 만큼 오래됐겠지. 어쩌면 새디가 아닌 남편이 넣어둔 건지도 모를 만큼, 아주 오래 전의 일이었을 수도.

제인은 화병 속에 든 돈을 곧장 새디에게 돌려주지 않는다. 대신 새디의 일상적인 장소에 자주 기웃거린다. 새디가 타고 온 택시를 돌려보내고 그녀를 집까지 태워다 주며 의도적으로 새디의 집안에 침투한다. 새디의 집안 내부는 잡풀이 수북한 정원과 마찬가지로, 정돈이 하나도 되어 있지 않다. 언제부터 거기 놓여 있었는지 모를 벽난로 위 소품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는 동안 제인은 새디에게 처음 만난 사람치고는 다소 직접적인 질문을 꺼낸다. 결혼은 했는지, 평소엔 무엇을 하는지, 여행을 좋아하는지. 아마도 제인은 혼자서는 운전도 못 하는 할머니에게 화병 속 돈이 당장 필요한 상태인 건지 파악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인은 혼자 사는 할머니가 지녔을 강고한 경계심은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것 같다. 새디가 일주일에 한 번 빙고 게임을 치러 가는 교회에 찾아온 제인은 사기꾼 취급을 받으며 후추 스프레이 가격까지 당하고 만다. 그 사건을 계기로 새디는 경계를 차츰 낮춘다. 자신의 과도한 의심이 제인의 호의적 접근을 무턱대고 막은 건 아닌지 스스로를 탓하면서.

제인이 무슨 마음으로 새디에게 접근했는지는 알 수 없다. 돈을 돌려주기 싫어서였는지, 아니면 돈을 더 뜯어낼 수도 있겠단 마음이 들어서였는지. 어쩌면 언제든 돈을 건네줄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걸 셈하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죄책감이든 교묘한 술수든 무엇이 시작점이었든 간에 제인과 새디는 이제 종종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제인은 새디와 함께 마트에서 장을 보고, 교회에 가서 빙고 게임을 한다. 아주 이른 브런치를 먹고, 한낮에 강아지 전용 공원에 가서 잡담을 나눈다. 새디의 죽은 남편이 묻힌 묘지에도 함께 간다. 두 사람이 충동적으로 찾은 동물원은 1965년에 폐장되어 검게 녹슨 우리의 철골 구조만이 남아 있었다. 제인은 새디가 언제 마지막으로 샌 페르난도 밸리 바깥을 나갔었는지 궁금해진다.

<스타렛>(2012)

나는 제인이 새디와 함께 있을 때, 무척 포근한 상태였으리라 생각한다. 긴 외출을 끝내고 돌아온 집에서 느끼는 안락함 같은 것. 아주 오랫동안 누구에게도 틈을 내어주지 않았을 노년의 여성과 마주 앉아 햇빛을 쐬면서 빛바랜 것들을 길어 올리는 행위를 좋아했을 것이다. 이를테면 심장마비로 죽은 새디의 남편이 제법 유능한 도박사였다는 얘기나 죽은 남편과의 첫 데이트로 동물원에 갔었다는 얘기 같은. 골동품 전시장처럼 방치된 채 쌓여 있는 각종 물건과 무성한 풀숲이 되어버린 정원을 보며 제인은 아직 가져본 적 없는 자신의 집을 상상했을 것 같다. 벼룩시장에서 값싸게 가져온 물건으로 대충 꾸며놓은 임시 거처 말고, 진짜 집. 말하자면 새디의 집 같은 집. 정원 관리를 못한 탓에 우체부가 다치는 불상사가 생겨 소송을 당하고, 조사 기관으로부터 관리 능력 부족으로 법적 조치 경고를 받고, 실제로 홀로 집을 가꾸기 버거운 상황임에도 꿋꿋이 자신의 공간을 지키고 있는 새디와 어울리는 집. 그런 집을 상상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상상 속엔 늘 그랬듯 스타렛도 함께일 것이다.

스타렛은 작고 연약하며 유순한 강아지다. 그래서 제인이 머무는 곳이 때로는 스타렛에게 가혹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바꿔 말하면 제인에게도 가혹한 환경이란 뜻이다. 그러나 스타렛은 제인과 함께라면 어디서든 잘도 잠을 잔다. 시끄럽고 유해하고 불안정한 와중에도 스타렛은 제인의 포근한 품을 파고든다. 아무리 임시 거처를 떠돌아도 스타렛의 집은 제인, 제인의 집은 스타렛일 것이다. 가지치기도 제대로 하지 못할 만큼 늙어버린 새디와 버리지 못한 잡동사니들로 가득한 새디의 집처럼.

작년에 분가를 하고 나서 아쉬웠던 건 밍가만의 안전한 공간을 만들어주지 못한 것이다. 큰 사이즈의 캣폴과 고가의 캣휠 위에서 뛰놀게 해주고 싶었는데. 늘 방문을 활짝 열어두어서 더는 앞발로 방문을 긁지 않게 해줄 수 있었는데. 유해한 요괴 식물도 훈계꾼도 없이 안락하고 포근한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었는데. 어느덧 이사한 지도 일 년이 다 되어간다. 밍가 동생 깅가는 매일 덩치 큰 캣폴 위에서 나른하게 잠을 잔다. 그래서인지 나는 조금은 심통난 마음으로 화분을 들였다. 고양이에게 무해한 식물들로만. 마구 물어뜯어도 된다고 했다. 신기하게도 그전까진 식물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던 깅가가 자꾸 화분 위를 올라간다. 새벽마다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자고 일어나면 바닥에 나뭇잎이 하나둘 떨어져 있다. 그래도 혼은 내지 않았다. 낮에는 깅가와 함께 나무 두 그루를 창문에 나란히 세워두고 햇볕을 쬔다. 엄마에게는 아직 화분을 들였다는 얘긴 하지 않았다. 계절을 몇 번 더 나고 분갈이를 할 때쯤 말해야지. 엄마가 왜 그렇게 날마다 물을 넘치게 주려는지 이제 좀 알 것도 같다.

 <스타렛>(2012)
원제 Starlet
OTT 왓챠(WATCHA)
감독 션 베이커
출연 드리 헤밍웨이, 베세드카 존슨, 스텔라 매브
시놉시스
캘리포니아 샌 페르난도 밸리에서 친구 멜리사, 반려견 스타렛과 함께 살아가는 제인은 동네 벼룩시장에서 산 오래된 보온병 속에 일만 달러의 지폐가 들어있는 것을 발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