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졸업>(2024)

부끄러워서 혼났습니다, 무서워 죽겠습니다

요근래 tvN 드라마 <졸업>이 펼치는 생활의 장면 장면을 거울삼아 신경증적 푸념을 늘어놓고 있다. 내 욕망은 작품 속 인물들이 꿈꾸는 욕망을 닮지 못했다. 더 나은 밥벌이를 위해 매진할 힘, 내가 가진 패를 요리조리 굴려 다른 이를 끌어들일 힘, 쌓아 온 명성이 한순간에 무너지더라도 용기 있게 사랑할 힘, 새로이 다시 시작할 힘, 종합하면 더 위로 더 크게 계단을 밟아 상승하고자 하는 동력… 그런 에너지가 예전엔 분명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 날부터 도통 돌아오지를 않는다. 보고 배워 정치 싸움에도 기꺼이 나서고 성공도 좇으면 좋으련만, 그런 그릇은 못 되는 나는 이 드라마를 지켜보며 드라마 속 인물이 어서 삐끗하기를 충동적으로 염원한다. 으으 못났다, 치사하고 징그러운 인간. 챙피한 인간.

<졸업> 10화. 일명 대치동 백발마녀 최선국어 원장 최형선과 대치체이스 대표 스타 강사 서혜진의 한바탕 격돌이 지나가고, 서혜진은 과거 제자이자 현재 동료 강사, 남자친구인 이준호에게 최형선과의 대화를 회고한다. “싸울 때는 망나니처럼 굴고, 이기고 나선 도덕책을 읊어댄대. 내가 얼마나 가증스러운 사람인지, 얼마나 이기적이고 약아빠진 인간인지 아주 조목조목 짚어줬어.” 11화. 교과서 한 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하겠다는 교육론을 내세워 변혁을 꿈꿨으나 공교육의 한계에 부딪히고만 찬영고 국어교사 표상섭은 서혜진에게 자신의 학생 성하율이 방과 후 수업을 듣고 만든 독서노트를 보여준다. 신념이 입시 경쟁의 높은 파고에 밀려 낡고 무능한 것으로 부식될 위기, 그는 실패의 치욕과 자존심에 가려 놓치고 있던 학생의 마음에서 부끄러움을 건져 올린다. 뒤늦게 체면보다 더 중요한 책임을 깨달은 그가 고백한다. “부끄러워서 혼났습니다. 애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게 제일 부끄러웠어요. 여기서 더 부끄러운 선생이 될 순 없는 노릇 아닙니까.” 14화. 온종일 추문에 시달린 이준호가 치기와 살기로 얼룩진 눈빛을 거두고 이내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파묻는다. “저 살면서 오늘처럼 무서운 적이 없었는데요. 나 하나 잘 먹고 잘 사는 방법밖에 생각해 본 적 없는 등신이라서요… 지금 무서워 죽겠습니다.”

안판석 감독 특유의 롱테이크 장면 안에서 어떤 인간이 실패할 때, 천박한 본성이 한 뭉텅이로 드러날 때, 나는 내 비천한 사회생활을 리플레이해보곤 한다. 성급했다, 쉽게 믿었다, 붕 떴다, 실수했다, 왜 이렇게 안일한 선택을, 닥칠걸, 머저리다, 잠깐! 근데? 후회할 자격 있어? <졸업>의 인물들처럼 저지른 실수의 찌꺼기를 붙들고 부끄럽다, 무서워 죽겠다, 막 그런다.

<졸업>은 ‘사제 출격’을 메인 소재로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2018), <봄밤>(2019)의 분위기를 닮은 잔잔한 멜로 드라마로 홍보를 시작했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대한민국 학군 1번지’ 대치동 사교육 시장을 주 무대로 삼아 계급 문제와 한국 교육의 현주소를 말하는 방향으로 향한다. 안판석 감독이 그간 <아줌마>(2000), <아내의 자격>(2012), <밀회>(2014), <풍문으로 들었소>(2015) 등 여러 작품을 통해 한국 중산층의 계급적 욕망에 얽힌 위선과 속물근성을 풍자해 왔던 이력과 궤를 같이한다. 이들 드라마에선 일상에 계급과 자본의 문제가 복합적으로 뒤엉켜 있으므로 당연히 밥벌이와 연애의 시공간은 분리되지 않는다. <졸업>의 인물들 역시 저마다의 생활세계 안에서 일과 사랑, 세속적 욕망을 품고 들썩거리는 대치동을 분주하게 오간다. 관계와 감정은 때로는 약점이, 때로는 무기가 된다.

tvN <졸업>(2024)

“문학의 시대는 간 게 아니라 영원한 거라고”

<씨네21> 인터뷰에서 “감독님이 내겐 은사다. (…) ’드라마작가는 이 시대의 마지막 문학가라는 사명을 잊지 말라’는 말을 믿고 계속 이 길을 가려 한다”는 박경화 작가의 말에 안판석 감독은 이렇게 답한다. “나는 여전히 드라마가 문학의 본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이야길 작가님들에게 늘 한다. 문학의 시대는 간 게 아니라 영원한 거라고.” 같은 교육을 주제로 하더라도 계급의 모순을 우스꽝스럽게 다루던 전작들을 지나, <졸업>은 깊이 읽기와 감각하기를 가르치는 법, 체득하는 법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1등급만 목표가 아니라, 인간 세상을 마주하는 법을 배우는 게 텍스트 읽기의 근본적인 목적이라고.

4화. 서혜진이 수업에 온 유일한 희원고 학생이자 최선국어 스파이 이시우에게 질문을 던진다. “시우는 박완서 선생님 아니?” 서혜진과 이준호가 영역을 확장하기 위한 처세술 중 하나로 택한 무료 강의에는 소설가 박완서의 삶과 살았던 시대가 주요하게 등장한다. 시우가 최형선 원장에게 보여 준 그날의 노트 필기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지문 밖의 세계가 더 넓다’ 시우는 덧붙인다. “교과서 첫 장에 보면 ‘국어 공부의 목적은 인간답게 사는 데 있다’고 쓰여 있거든요. 이거 읽는다고 제가 더 인간다워지거나 그런 것 같지 않고. 인간다운 게 뭔지 모르겠고. 아무튼 국어는 좀 뜬구름 잡는 과목 같아서 싫었거든요. (…) 그런데 시간을 지나서 천천히 다가가니까 처음으로 조금 재미있었어요. 딱히 제가 더 인간다워진 것 같진 않았지만 문학 비평문 같은 거 써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시우가 겪은 정신 없는 들락거림은 내가 문학을 곁에 두고 바라보며 애증하는 방식이다. 어떤 날의 시선은 밖으로 향하고, 또 다른 날에는 안으로 향한다. 시선이 마구 섞일 때도 많다. 생활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이 궁금해서, 세계를 향한 누군가의 대꾸가 궁금해서, 이런 질문의 크기가 새삼 무서워서 이번에도 어김없이 안판석 드라마의, <졸업>의 애청자가 되었다. 우리 삶은 복잡하고, 우린 자꾸만 복잡한 선택을 하는데, 우리는 저 인간은 나는 왜 그럴까 알고 싶어서.

, 여기 나를 가장 떨게 만든 질문, 서혜진의 절친이자 변호사 차소영이 던진 질문이 있다. “어떤 기분일까? 내가 되게 혐오하는 내 모습이 있어. 그냥 외면하면서 살았어. 근데 어느 날 갑자기 불쑥 내가 사랑하는 사람한테서 그 모습이 나타나는 거야. 그냥 툭, 아무렇지도 않게.” 차소영의 남편 금춘일이 맞장구친다. “이야, 쫌 무섭지.”

 <졸업>(2024)
OTT Tving
연출 안판석
극본 박경화
출연 정려원, 위하준 외
시놉시스
스타 강사 서혜진과 신입 강사로 나타난 발칙한 제자 이준호. 대치동에 밤이 내리면 이토록 설레는 미드나잇 로맨스가 시작된다. 우리가 미처 몰랐던 학원 강사들의 다채롭고 밀도 있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