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해한 모든 것들로부터
지난해 봄, 내게는 가장 소중한 가족이었던 고양이 밍가를 떠나보냈다. 밍가와 나는 십 년을 함께 살았다. 밍가는 습관적으로 구토를 자주 한다는 것 빼고는 딱히 지병이랄 게 없는 고양이었다. 죽기 몇 달 전에는 더 오래 함께 할 작정으로 미루던 치과 치료도 받았고, 앓던 이를 뺀 덕에 먹기도 훨씬 잘 먹었다. 앞으로 십 년은 더 살아야 한다며 영양제도 챙겨 먹이고, 이전보다 활동량을 늘리기 위해 시간을 정해 열심히 놀아주기도 했다. 그때쯤 나는 서울에서 양양으로 이주를 생각하고 있었고, 그러려면 믿을 만한 동물병원을 찾는 것 또한 관건이었다. 나의 이주 계획에는 그런 것들이 중요했다. 아무리 근사한 집이어도 반려묘를 키울 수 있는 집이어야 했고, 3차 진료까지 가능한 대형 동물병원과의 접근성도 따져봐야 했다. 족히 세 시간은 넘는 이동 시간을 잘 버텨내줄 수 있을까. 치아 적출 후 한동안 넥카라를 한 채 생활하던 밍가의 잠든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나는 과연 양양으로 이주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여러 날을 고민했다. 밍가는 살면서 다섯 번의 이사를 경험했으니 조금 멀더라도 한 번 더 괜찮을 거야, 그치? 나는 자는 밍가에게 주문을 외듯 내가 계획한 우리의 미래를 속삭여주었다. 그러니 건강해야 한다고, 딱 십 년만 더 살아달라는 당부와 함께.
밍가는 이상 증세를 보인 지 이틀 만에, 확실하게는 만 24시간도 안 되어 죽었다. 원인 불명의 급성 신부전이었다. 밍가가 담긴 박스를 두 팔로 안은 채 병원을 나와 집까지 일 킬로미터 남짓한 거리를 걸으며 나는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다. 뭐가 문제였던 걸까. 그날부터 나는 밍가의 죽음을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일말의 근거를 찾아내는 데 꽤 오랜 시간을 들였다. 눈을 뜨고 일어나 움직이고 일을 하다가 밥을 먹고 다시 잠에 들 때까지 나는 종일 그 무렵의 타임라인을 분 단위로 복기하고 또 복기했다. 내가 못 본 사이에 벌어진 일들, 혹은 내가 인지하고도 까먹은 일들이 있는 건지. 이틀 전 새벽, 나를 따라 현관문 밖으로 뛰쳐나가던 밍가의 발을 내가 닦아주었던가. 건물 계단 청소를 언제 했더라. 그때 화장실 하수구에서 계속 락스 냄새가 올라왔던 것 같았는데.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다 따져보고, 그것이 원인으로써 말이 되는지를 수없이 곱씹었다. 밍가의 마지막을 함께 해준 수의사를 한 번 더 찾아가 내가 추측해 낸 여러 죽음의 가능성을 늘어놓다가는 엉엉 울기도 했다. 답을 알고 싶었다. 명확한 이유가 있었으면 했다. 차라리 나의 부주의함이 원인이 되었다고 확실하게 말해주었으면 했다. 그러나 수의사는 가능성은 가능성일 뿐이고, 그걸 이제와 따지는 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건 보호자 님 스스로를 탓하게 되는 것일 뿐이라고.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당시 내게 자책은 가장 간편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법이었다.
<릴리와 찌르레기>의 릴리와 잭 부부는 자식인 케이티를 잃은 지 일 년이 지나도록 그 사건으로부터 단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케이티는 수면 중 갑작스레 사망하게 되는 영아 돌연사 증후군으로 숨을 거두었다. 초등학교 미술 교사였던 잭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마주하는 것이 어려워져 일을 관두었고, 얼마 후 자살 시도를 했다가 정신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고 있다. 매주 가족 방문의 날마다 아내인 릴리가 찾아오지만 어쩐지 잭은 그녀를 불편해한다. 릴리가 생각보다 너무 잘 지내는 것 같아서. 잭은 아직도 아침에 눈을 뜨면 케이티의 우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린다. 그렇게 눈을 뜨고 나면 마치 그날로 되돌아간 것만 같다. 잭의 시간은 아직도 그날에 머물러 있다. 잠이 든 아이를 흔들어 깨우기라고 했다면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러나 무언가를 되돌릴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은 정신을 차리고 나면 곧장 참혹한 절망으로 바뀌어 잭을 괴롭힌다. 잭은 가슴 찢어지게 괴로운 그 순간을 계속 복기하면서 늦잠을 잔 자신을 책망하는 것만이 딸의 죽음을 해석해내는 유일한 방법인 양 군다.
그에 반해 릴리는 잭의 표현대로라면 버티는 사람이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과 똑같이 그녀는 매일 마트로 출근해 물품을 정리하고 캐셔 일을 한다. 입원 중인 잭을 대신해 집을 지키며 매주 잭이 좋아하는 스낵을 사 들고 면회를 간다. 잭의 주치의는 릴리에게도 상담을 받아보라 권하며 의사를 추천하지만 그녀는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인다. 이미 역할 분담이 끝나기라도 한 것처럼 릴리는 아픈 사람을 잭으로 두고, 자신을 상대적으로 덜 아픈 사람으로 위치시킨다. 그러나 그녀 역시 무기력하고 의욕 없는 나날을 보내는 건 마찬가지다. 업무를 하면서도 종종 넋이 나가는 탓에 상품 가격을 잘못 태그하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어느 날 충동적으로 케이티의 방을 싹 정리했다는 릴리의 말에 잭은 크게 화를 내고 면회를 거부한다. 하지만 그간 잭이 없는 집을 지키며 케이티가 잠들던 침대와 두 사람이 같이 꾸민 벽화를 일 년 넘게 매일 매 순간 마주한 사람은 잭이 아닌 릴리였다. 그녀는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 면밀하게 들여다볼 새가 없었다. 언제나 보호자의 입장이었으니까.
언젠가부터 릴리는 집 마당에 있는 나무 위에 새 한 마리가 유독 거슬린다. 자신의 영토를 지키는 것에 매우 민감하다는 찌르레기였다. 찌르레기는 마당 텃밭을 가꾸는 릴리에게 시도 때도 없이 공격을 일삼는다. 참을 수가 없어진 릴리는 나무 밑에 독극물이 든 덫을 놓았으나, 찌르레기가 아닌 애먼 다른 새가 죽게 되고 릴리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폭우가 쏟아지는 밤, 잭의 주치의로부터 소개받은 정신과 의사를 찾아간 릴리는 문득 자신의 현 상태를 새삼 직면하게 된다. 의사는 사람들은 이유 없이 일어나는 비극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말한다. 감정을 제대로 분출하지 않으면 잘못된 방식으로 감정이 터져 나오게 될 것이라고. 릴리에게는 그것이 분노로 작용한 셈이었다. 그 이후로 릴리는 그동안 자신이 꾹꾹 눌러 담은 감정을 조금씩 토해내기 시작한다. 딸의 죽음도 그러하지만, 자신을 두고 떠나려 했던 잭을 향한 다소 복합적인 감정들 역시.
밍가가 떠난 지도 일 년이 되어간다. 그동안 나는 영화 속 잭처럼 굴기도, 또 릴리처럼 굴기도 했다. 무척 슬프고 힘들었지만 밍가의 죽음이 변명 삼아 내 생활을 게을리하거나 그르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가끔은 한없이 생각에 잠긴다. 그때 내가 좀 더 빨리 알아차렸다면, 혹은 내가 그때 그러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을까. 그러나 시곗바늘을 아무리 돌린다 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다. 영화 속 의사의 말처럼 이유 없이 일어나는 비극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도저히 풀 수 없는 암호로 굳게 잠겨버린 일들은 뜻하지 않게 찾아들고, 한동안 그것을 해석해내려고 부단히 애를 먹겠지. 그 애씀의 시간을 애도라고 부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무너지고 화가 나고 흔들리며 무력해지는 각각의 순간들 전부를. 슬프고 분노하고 나빠지다가도 그래도 조금씩 앞으로 움직여가는 그 지난한 시간들 전부를. 네 번의 계절이 지나 나는 양양으로의 이주를 앞두고 있다. 밍가가 잠든 해변을 이제 매일 산책할 수 있게 되었다. 원래 계획과는 조금 다른 모양이지만, 그럼에도 같은 곳에 있을 수 있어 좋다. 봄이 되었다. 이맘때면 더 바라게 된다. 우리 모두에게 각각 찾아든 모든 불가해한 비극으로부터 치유와 회복을, 그리고 안녕을 빕니다.
The Starling
OTT Netflix
연출 시어도어 멜피
출연 멜리사 매카시, 크리스 오다우드, 케빈 클라인
시놉시스 직장에선 멍하니 넋 놓기 일쑤, 남편은 정신 병원에 입원. 아기를 잃고 무기력하게 살아가던 여자. 어느 날, 정원에 둥지를 튼 찌르레기와 사투를 벌이며 치유의 여정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