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캘버트는 평생을 살았던 워싱턴 D.C를 떠나 연고가 없는 샌프란시스코의 어느 실버타운으로 이주했다. ‘시니어 클라우드 솔루션 아키텍트’라는, 캘버트로서는 도통 알 수 없는 직책을 가진 아들과 최대한 가까이 있기 위해서였다. 캘버트는 아들이 하는 일을 잘은 모르지만 회사 내 입지가 높다는 것과 좋은 집에 살고 있다는 것은 안다. 샌프란시스코에 산 지 수년이 되었지만, 캘버트는 실버타운 밖을 나가본 일이 많지 않다. 가끔 자원봉사자를 대동하여 입주자들과 함께 대형 쇼핑몰에 가서 필요한 것들을 사오는 정도. 아들은 일 년에 열 번 남짓, 승진 소식을 알리기 위해서, 또는 덴젤 워싱턴이 쓴다는 수제로 된 면도솔 같은 선물을 하기 위해서 찾아온다. 캘버트를 처음 샌프란시스코로 불러들일 때는 여유가 있을 때마다 도시 명소를 구경시켜 준다고도 했지만, 아들은 높은 직책에 맞게 늘 바쁘고, 두 사람이 같이 있는 순간마다 아들을 찾는 전화는 수시로 걸려 온다. 캘버트는 아들이 바쁘다는 걸 십분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론 아들이 바쁘다는 걸 적잖이 티 낸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아들이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다음을 기약하며 만남을 끝낼 때는 더더욱 그렇다.
실버타운에서 캘버트의 일상은 단조롭다. 한 손에는 두꺼운 책을 늘 끼고 다니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보드게임―아들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구식 게임이라고 하는―백개먼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사교성이 좋은 다른 입주자들과는 달리, 캘버트는 대게 혼자 있는 편이어서 아들은 그가 좀처럼 적응을 못 하는 것 같다며 걱정스럽게 지켜본다. 고대적 게임이나 하며 무기력하게 시간을 때우는 과묵한 노인. 남은 삶에 호기심이나 활기 따위가 더는 생기지 않을 것만 같은 노년의 구식 남자. 아들의 눈에 캘버트는 그렇게 비친다. 그러나 정말로 캘버트의 삶은 그렇게 끝이 나는 걸까? 모종의 의무감으로 눈도장을 찍듯 짧은 방문을 마치고 황급히 떠나는 아들이 보는 캘버트의 모습과 캘버트 본인이 지각하고 있는 현재 모습은 얼마나 같고 또 다를까. “부모와 자식이란……” 떠나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다가 고갤 절레절레 흔들며 읊조리던 캘버트의 말처럼 부모와 자식이 서로를 향해 느끼는 딱 그만큼의 낙차 같을까. 그건 아주 오래전, 어린 아들을 데리고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경기를 보러 가던 그때, D.C에서 가장 맛있는 아이스크림 가게에 가 매주 아들과 버터 피칸 아이스크림을 먹던 옛 시절과 현재만큼의 시차일까.
퍼시픽 뷰라는 실버타운의 시계는 입주자들에 따라 제각각 다르다. 알츠하이머 증세가 서서히 심해지는 글래디스의 시계는 화려한 연극 무대의 의상을 담당하던 시절에 멈춰 있고, 최근에 암이 재발한 엘리엇은 쿠바산 고급 시가를 온종일 피워도 아무렇지 않았던 시절에 멈춰 있다. 1979년식 쉐보레 콜벳과 볼티모어 오리올스 시즌권을 제외하면 많은 걸 더 가지지 않아도 행복했던, 아내와 아들에 대한 사랑만으로도 충만했던 캘버트의 시계 역시 젊고 건강한 그 시절에 머문다. 각자의 시곗바늘은 다 다른 방향에 어지러이 놓여 있지만, 그렇다고 그 시곗바늘이 현재를 공격하거나 위협하지는 않는다. 지나간 것, 지나간 사람, 지나간 시간에 대한 작별과 순응을 하는 게 그들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것―이를테면 평생을 함께 일궈온 반려자가 먼저 떠난다거나 기억을 잃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거나 하는―그리고 그걸 감당하지 않으면 죄책감이라는 족쇄에 오래도록 속박당하게 된다는 것도 그들은 크고 작은 죽음과 상실을 마주하면서 이미 잘 알게 되었다. 단지 그들의 시곗바늘은 아주 고요하게, 그들의 삶에서 가장 찬란했던 시절의 한 귀퉁이를 오래도록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셰익스피어의 연극 《좋으실 대로 As You Like It》에 나오는 ‘두 번째 유년기와 망각’ 단계처럼. 그림을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낭독하며 때로는 왕년에 즐겼던 위스키를 마시고 시가를 피우며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적적한 오후를 함께 보내는 동안에도 그들의 시곗바늘은 계속 어떤 한 방향을 향해 멈춰 있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에도 누군가는 알츠하이머병 치료를 받기 시작하고, 어제까지만 해도 함께 여일을 보내던 옆 호실 입주자가 돌연 죽음에 이르는 것을 일상의 한 조각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한편, 매일 죽음이 도사리고 있음에도 표면적으로는 적요한 풍경을 띠고 있는 퍼시픽 뷰에 홀연히 은퇴한 건축학과 교수인 찰스가 입소하면서 하루가 멀다 하고 시끄러운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값비싼 사치품이 도난당하고, 질투에 눈이 멀어 혈흔이 낭자한 폭력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고, 수년째 몰래 하던 도박이 수면 위로 드러나기도 한다. 기실 실버타운에서의 도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위장 잠입한 사설탐정사무소의 보조 인력인 찰스는 입주자들 전부를 용의선상으로 두고 경계해야 하지만, 자꾸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노인들을 친구의 감정으로 대하게 된다. 스파이는 무릇 외로워야 한다는 탐정의 냉정한 조언은 처음 실버타운에 입소할 때 센터 소장으로부터 전해들었던 말과 정확히 대치된다. 노인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의 요인이 사실 질병보다도 외로움에 있다는 것. 특히 캘버트를 대하는 마음이 점차 각별해지면서 찰스는 묘한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찰스는 일 년 전에 아내를 잃었고, 몇 시간 거리에 떨어져 사는 딸과는 애도와 같은 감정적 공유를 하지 못하는 상태이며, 아직 죽은 아내의 유품 정리를 하지 못했다. 집에만 있지 말고 소일거리라도 하라는 딸의 걱정스러운 종용에 무턱대고 탐정 일을 시작한 찰스는 추리를 제대로 끝낼 수 있을까. 인류가 기원전부터 해왔다던 유구하기 짝이 없는 보드게임을 앞에 두고 주사위를 굴리는 새로운 벗과의 교우는 지켜나갈 수 있을까. 샌프란시스코에서 손에 꼽을 만큼 맛있다는 버터 피칸 아이스크림을 쌓아둔 채 자신이 좋아하는 장소들을 하나씩 소개해주고 반려자와의 첫 만남 이야기를 해주려는 그를 어떻게 대해야할까. ‘온 세상은 연극 무대. 모든 사람은 다 배우일 뿐이지요. 등장과 퇴장을 반복하며 생애를 사는 동안 여러 역할을 맡습니다.’ 극 중 찰스가 낭독한 셰익스피어의 구절이다. 이제 찰스는 어떤 역할을 맡는 중일까. 캘버트와 퍼시픽 뷰의 다른 입주자들은. 그리고 우리의 지금은.
원제 A Man on the Inside
OTT 넷플릭스(NETFLIX)
크리에이터 마이클 슈어
출연 테드 댄슨 엘리자베스 엘리스 라일라 리치크리크
시놉시스
은퇴한 교수가 사립 탐정에게 고용되어 샌프란시스코 실버타운에 스파이로 잠입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