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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잃고 말더라도
캐럴은 예고된 종말을 반년 남짓 앞둔 시점에 살고 있다. 케플러라는 행성이 지구에 가까워질수록 우리가 알던 날짜의 개념도, 사회적 규약도 점점 희미해진다. 사람들은 더 이상 일을 하지 않고, 때로는 아예 옷도…
부적절한 기쁨, 적절한 슬픔
나는 가끔 모로 누워 하늘을 보려 한다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습관처럼 가끔은 관 같은데 들어가고 싶다고 너스레 떨곤 한다. 왜 하필 관이냐고 묻는 이들 있다. 이미 관을 대체할 만한 궤…
우리는 서로를 느꼈다!
한겨울 깊은 밤, 서울의 한 지하철 역사 안에는 여자들만이 가득했다. 흡사 마거릿 애트우드 소설의 한 장면 같았다. 지상을 향해 줄지어 계단을 오르던 여자들. 길게 뻗은 언덕길을 숨죽여 걷던 여자들. 경찰이…
가려움증의 안과 밖
내일, 내년, 미래 매년 마지막 날에는 간결한 새해 계획을, 이를테면 2022년 12월 31일 결심한 “리드미컬한 인간 되기” 같은 일종의 캐치프레이즈를 궁리하곤 한다. 2023년 12월 31일에는 광화문 광장 서울빛초롱축제 사이를 걷다가…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캘버트는 평생을 살았던 워싱턴 D.C를 떠나 연고가 없는 샌프란시스코의 어느 실버타운으로 이주했다. ‘시니어 클라우드 솔루션 아키텍트’라는, 캘버트로서는 도통 알 수 없는 직책을 가진 아들과 최대한 가까이 있기 위해서였다. 캘버트는 아들이…
스크린이라는 세계, 아바타라는 육체
게임 속 지도 밖 모니터 앞 그가 물었다. 게임 맵의 끝에 가본 적 있냐고. 금세 상상에 빠졌다. 투명하거나 반투명한 막힌 벽, 아무리 키보드 방향키를 눌러 발버둥쳐도 넘어갈 수 없는 세계의…
소리 없이 말없이, 그러나 후회 없이
침묵에 가깝도록 음악이 배제된 영화를 마주하게 되면 무척이나 설렌다. 영화의 시작을 알리며 서사 안으로 즉시 빠져들도록 유도하는 적재적소의 사운드트랙에 매료될 때도 있지만, 장치 하나 없이 현실과 비견한 장면을 묵묵하게 그려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