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보통의 존재들을 위한 쇼
보이고 싶은 대로 나를 드러내기가 더없이 쉬운 시대다. 나를 모르던 사람들은 나를 만나기 전에 내 소셜미디어 계정의 무드와 컨셉을 미리 봐두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추측할 수 있다. 내가 지니고 취하는 것들의 나열을 통해 나라는 사람의 취향을 파악하고 소득수준을 짐작하기도 한다. 내가 구성한 타임라인이 곧 나의 디지털 연보이자, 자아의 표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나를 연출하는 능력을 키울수록, 나는 실제의 나보다 근사하고 더 나은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 자칫 잘못하면 자기 자신조차 그런 사람이 되었다고 믿어버리기 쉬워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애나는 그러한 연출 능력이 대단히 뛰어난 인물이다. 그럴싸하고 매끄럽게 자신을 포장할 줄 아는 사람. 포장지는 아름답고 값비쌌다. 고급 호텔에 묵으면서 호화로운 크루즈 여행을 다니고, 프라이빗 항공기를 타고 여행을 다니며 100달러 팁쯤은 가볍게 내는 사람. 명품 브랜드의 시즌별 컬렉션 제품들을 소유하고 있는 것은 물론, 패션 센스 역시 월등히 뛰어나고, 미술품에도 조예가 깊은 사람. 그녀가 취하는 것들만 보더라도, 그녀가 어떤 계층에 속해 있는지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그리고, 애나는 그 ‘가늠’을 파고들었다.
2017년 뉴욕에서 벌어진 실제 범죄 사건을 바탕으로 만든 넷플릭스 드라마 <애나 만들기>는 독일의 백만장자 상속녀 신분으로 위장해 사기 범죄를 저지른 실존 인물에 관한 이야기다. 그녀는 예술 재단을 설립하기 위한 목적으로 수백억 원 규모의 은행 대출 심사를 앞두고 있었고, 자신이 사용하는 유럽 은행의 시스템 탓에 인출이 늦어진다는 거짓말로 결제를 늦추거나 돈을 빌리다 빌미가 잡혀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애나의 지인이었던 베니티 페어의 기자가 칼럼을 기고하면서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고, 21세기형 새로운 사기꾼의 등장, 그것도 뉴욕의 사교계를 완벽하게 속였다는 점에서 애나는 재판 당시 입은 룩마저 화제가 될 정도로 졸지에 셀러브리티가 되었다. 유명인들이 재판 출석 때 입은 룩을 보고 ‘블레임 룩Blame look’이라고 칭하며 셀링 포인트까지 부여하는 미국에서, 자본주의와 쇼맨십의 오묘한 결탁이 빚어낸 새로운 스타의 탄생이었다.
<애나 만들기>는 구치소에 수감되어 재판을 기다리는 애나와 그녀를 취재하려는 기자 비비안을 두 축으로 삼아 서사를 전개한다. 비비안은 데스크에서 지령받은 기사를 포기하고, 특종을 위해 애나를 심층 취재하기로 마음먹는다. 이미 기소가 됐을 만큼 애나의 혐의는 짙었고,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 한 유죄 판결은 당연한 결과였음에도, 비비안은 악명 높은 애나의 이야기를 더 심도 깊게 파고들고자 했다. 출산을 앞둔 비비안에게 특종이 절박했던 까닭은 그녀가 겪은 일련의 사건 때문이었기도 한데, 그녀 역시도 이른바 ‘악명’ 프레임에 노출된 전적이 있었다. 그 사건의 시시비비와 무관하게 완전히 추락한 자신의 평판을 되살리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애나에 대해 더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비비안은 알려진 일화들이 아닌 이야기들을 찾으러 다닌다. 애나가 미국에 오게 된 직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주변을 머물렀던 인물들을 만나 인터뷰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애나에 대해 각기 다른 진술을 한다. 인터뷰를 하면 할수록 애나가 벌인 범죄의 정황이 점점 더 구체적이고 정확해지는 반면, 애나라는 사람의 신원을 파악하기 어려워진다. 그러나 비비안은 출생연도와 국가, 여권에 기재된 진짜 이름과 계좌번호 등으로 애나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애나가 도대체 왜, 자신의 삶을 값비싼 포장지로 휘감게 되었을까? 또한, 사람들은 어떻게 애나에게 이토록 빠져들었을까? 또래 20대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애나의 어떤 것이 그들의 미래를 쥐고 흔들게 만들었던 걸까? 비비안의 궁금증은 오로지 이것이었다.
애나에게 인스타그램은 이력서에 가까웠다. 어떤 학문을 전공했는지, 어떤 분야에 종사하는지, 그 일을 숙련해온 기간은 얼마나 됐는지와 같은, 일종의 경력증명서. 물론 경력은 오로지 하나였다. 날 때부터 금수저였던 슈퍼 영앤리치. period. 그걸로 충분했다. 극중 애나가 가장 많이 했던 대사는 “내가 누군지 알아?”였다. 그녀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 대사는 직함이 쓰인 명함처럼 작용했다. 면회를 온 비비안에게 애나는 유명해졌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녀는 온 세계를 돌아다닐 수도, 초호화 휴양 여행을 즐길 수도 없었고, 온갖 파티에 참석해 다양한 셀러브리티와 기업인 들을 만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 모든 즐거운 일들을 빠짐없이 일일이 인스타그램에 기록하는 것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한 연출을 통해 자신이 특별하고 중요한 인물이라는 걸 끊임없이 강조하지 않아도 되었다. 더 이상 그럴싸하게 굴지 않아도, 애나는 자신의 고유한 스토리만으로 유명해지거니와, 독특한 셀링 포인트를 가질 수 있게 될 거라 여긴 것이다.
이 쇼를 보는 내내 나는 비비안의 욕망이 더 흥미롭다고 느꼈다. 주야장천 자신의 특별함을 드러내려 안간힘을 쓰는 애나와 달리, 비비안은 성취를 위해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승부수를 던진다. 당장 출산이 임박한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 취재와 원고 집필에 몰두하게 되는 기저에는 육아로 인한 경력단절의 두려움이 컸다. 면회 때 자신이 부탁한 잡지를 가져오지 않은 비비안에게 애나는 “애 낳는 게 뭐 대수야? 누구나 다 하는 거고, 너는 특별하지 않아.”라고 날카롭게 반응한다. 비비안은 무례함이 잔뜩 묻어난 애나의 말을 전유해, 진통으로 몸부림칠 때마다 “I’m not special!”을 외치며 아이를 낳는다. 출산은 누구나 다 하는 거라고, 그러니 유별날 것도 없다고 자신을 다독이면서까지 그녀가 끝내 놓지 않으려던 것. 자기 스스로가 원하는 가치를 직접 증명해내기 위한 그녀의 분투는 더없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넷플릭스와 숀다 라임즈는 이 쇼를 제작하기 위해 애나 소로킨에게 상당한 금액을 주었다. 애나 소로킨의 인스타그램 계정 최근 포스팅은 타임스퀘어 광장 전광판을 수놓는 <애나 만들기> 의 홍보 영상이다. 그녀는 정말로 유명해졌다. 그러나 나는 이 쇼의 주인공이 애나가 아닌 비비안이라고 본다.
OTT Netflix
원제 Inventing Anna
크리에이터 숀다 라임스
출연애나 클럼스키, 줄리아 가너, 아리안 모아이드
시놉시스
대담한 사업가인가, 아니면 사기꾼인가? 독일 출신 상속녀 신분으로 접근해서 뉴욕 엘리트층의 마음을 사로잡은 애나 델비. 한 기자가 애나의 숨겨진 실체를 파헤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