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문: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2023)

환희와 눈 흘김, 어둠 속에서

장롱 안이나 식탁 밑을 좋아하는 어린이였다. 누군가기 나를 찾아낼 수도 있다는 두근거림과 아무도 찾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절망감이 뒤섞여 있고 미묘한 전기가 찌르르 통하는 공간의 캄캄함, 그게 좋았다. 그렇게 강렬하고 이상함 느낌을 품은 채 간절히 어둠을 필요로 하는 어른이 되었다. 나는 언제든 어디서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암전된 방을 원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극장은 최초의 공간이자 최후의 공간이다. 진정한 어둠은 오직 극장에만 있다. 극장을, 넓은 의미로 스크린이 존재하는 공간을 누군가는 함께 보기의 공간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극장이 혼자만의 공간으로 변신하는 때를 안다. 스크린은 뜰채로 나를 떠서 절벽에 살포시 올려놓고, 나는 눈이든 귀든 땀샘이든 활짝 열어 허공에 갖가지 감정을 흩뿌린다. 속수무책으로 빨려 들어갈 적에 내가 그러고 있단 것도 잊은 채로, 세계의 밑바닥을 벅벅 긁어대는 혼동에 휘감겨 시간은 자유자재로 흐르고… 산만한 나는 영화에 홀릴 기회가 귀하다는 걸 알기에 좌석 주위로 결계를 친다. 영사기 빛에 살갗이 시뻘겋게 익는 영화, 마틴 스콜세지 시네마 짤을 허공에 흩뿌릴 수 있는 영화, 그런 영화를 만나기 위해 바깥에서 어둠으로 도피한다. 습관처럼 나를 가두기 위해 극장에 도착하고 나는 시네마 안에서 진정 혼자가 된다.

종종 극장에 갇혀 생각한다. 나는 왜 자꾸 보려고 하는가. 왜 남들보다 먼저, 가급적 많이 보고 싶을까.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어쩌다가 시작해 버렸으니까? 지적 허영심 때문에? 많이 본다고 좋은 사람이 되는 게 아니란 걸 알면서도? 눈빛 반짝이기보다 째려보기, 내려다보기, 눈 질끈 감기를 멈출 수 없는 건 도대체 왜지? 한때 영화 주위를 빙글뱅글 돌면서 씬의 언저리에서 엄지발가락 끄트머리를 넣었다 뺐다 했을 뿐 이제는 영화 주변의 일이라고는 전혀 하지 않으면서, 집중력이 부족을 이유로 모니터 화면으로 보는 일을 점점 더 주저하면서, 스스로를 극장에 가둠과 동시에 집에서의 진득한 시청을 점점 멀리하면서 말이다.

몇 년 전 영화 잡지 시네필 특집 앙케이트에 참여한 적 있는데, 나는 그때 내가 시네필이 아니라고 답했다. 단지 영화 목격자 정도일 뿐이라고. 영화라는 주술에 빠르게 매혹되려면 더 많이 알아야 한다는 환상이 있다. 아무도 시네필 자격증 같은 걸 발급 하지는 않지만 자기검열 테스트에 걸려들고는 한다. 어떤 영화를 말할 때, 과거의 영화를 경유해 맥락을 짚는 일을 자연스레 할 수 있는가? 영화 이론에 진심으로 파고든 적 있었나? 인생 영화 베스트 10을 꼽을 수 있나? 레터박스에든 왓챠피디아에든 노트에든 관람 리스트를 기록하고 있는가? <킴스 비디오>의 감독처럼 영화 해방을 위해 해적질에 열과 성을 다하고 있나? 앞선 시네필을 선배라고 부를 수 있을까? 영화 동료나 공동체에 속해있지 않은데? 아직 보지 못한 영화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가? 더 일찍 태어나 더 많은 영화를 봤다면 좋았을 텐데 생각하는가? 이런 게 시네필이라면 폐쇄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이지 않나? 그래서 나는 해당하는가? 이 고민을 둘러싼 모든 게 모순이다. 시간은 유한하고, 내 앞에는 더 많은 영화가 기다리고 있고, 어쩌면 미래엔 정말 영화가 사라질지도 모르는데 시간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정전을 탐험해야 할 것 같고, 봐야 할 영화는 쏟아지고… 90년대 시네필을 동경하고, 흠모하고, 질투하고, 탓하고…

<노란문: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2023)

“액체 같은 사람들이 모여 기체 같은 꿈을…”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노란문: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는 90년대 초 서울 대학가를 중심으로 구성된 시네필 공동체 중 하나인 ‘노란문 영화 연구소’ 회원들의 30년 전 회고를 담은 “<라쇼몽> 구조의” 다큐멘터리 영화다. 어쩌면 지구상 가장 쿨하고 혼돈으로 가득 차 있던 시대, 학생운동은 서서히 종말을 맞이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이 유행하고 ‘조그셔틀’ 같은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출몰하던, <키노> 같은 아카데믹한 영화 잡지가 생겨나던 90년대에 삼삼오오 모여든 이들은 영화에 씌어 집착적으로 VHS를 수집하고, 소장/대여 리스트를 만들고, 씬을 분석하고, 연구하고, 잡지를 발행하고, 찍고, 튼다. 그 중심에 8mm로 촬영한 봉준호 감독의 첫 번째 스톱 모션 단편 영화 <룩킹 포 파라다이스>가 있다. 노란문 멤버들은 바깥세상의 바나나 나무를 꿈꾸는 지하실 고릴라 이야기가 담긴, 지금 봉준호 영화의 근원이기도 한 이 영화를 회고하며 말한다. “백수 시절인데 뭘 하고 싶은지를 정확히 알지 못했고 뭘 해야 될지도 사실 정확히 알지 못했고 근데 어디로 가고 싶은지는 확실히 알았고…” 현재, 이 거침 없는 우정의 기억은 꿈이다. 손에 잡히지 않는. 노스텔지어라고 불리는. 그러나 영화를 둘러싼 드넓은 공간 안에서 이들의 시간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영화가 그렇게 탄생했듯, 그런 식으로 살아있듯.

며칠 전, 허우 샤오시엔 감독이 알츠하이머로 투병 중인 사실을 알게 됐다. 차기작을 준비하던 중 코로나19 후유증으로 진행이 어렵게 됐다는 소식도 들었다. 가족 성명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코로나19 확진 전에 감독님은 영화를 좋아하는 마음이 점점 순수해지고 있다고 종종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올해 봄, <비정성시> 4K 리마스터링 버전을 보기 위해 대만에 다녀왔다. 과거 미 대사관저 공간을 허우 샤오시엔이 매만졌다는 타이베이 필름 하우스는 도시의 습기를 잔뜩 머금은 쿰쿰한 영화관이어서 더 아름다웠고, 이 영화에 추억 있음이 분명할 대만의 중장년 관객이 자리를 가득 채웠다. 점점 흩어지는 민남어처럼 스러지는 역사, 인생, 그 위로 흐르는 더욱 선명해져 더욱 서글픈 영화. 영사기의 빛이 먼지를 비출 때면 영화는 시간이 지워지지 않도록 붙잡아 매는 존재라고 확신한다. 감독은 그런 일을 하는 사람 중 하나다. 스크린 위로 기억을 소환하던 마술사가 점점 잊어가는 병에 걸렸다니, 뿌옇게 슬펐다.

보는 일을 멈출 수 있을까? 보는 일을 멈출 때 밀려오는 권태는 어떻게 하지? 영화를 향한 알 수 없는 마음이 멈추지 않기를 미적지근한 온도로 셈해 본다. 신수원 감독의 <오마주>를 보고 나서 적은 메모를 발견했다. 영화는 빛으로 만들어진 것. 빛이 있으므로 폐허에서도, 잊혀진 것에서도, 낡고 병들고 지친 삶에서도, 상실에서도, 결핍에서도 길어 올릴 수 있는 것. 다시 이어 붙여 매듭지을 수 있는 것.

 <노란문 :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2023)
OTT 넷플릭스
연출 이혁래
출연 최종태, 봉준호, 임훈아, 이동훈, 장은심, 김민향
시놉시스
영화를 향한 열정이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던 90년대. 봉준호 감독을 비롯한 한국의 젊은 시네필들이 새롭게 등장했던 그때 그 시절을 밀착 조명한 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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