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만큼 사랑해>(2022)

불꽃과 재와 사랑의 맹세

화산만큼 사랑한다는 건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사랑의 불꽃’이라는 제목으로 상영됐던 다큐멘터리 제목이 정식 공개에 맞춰 <화산만큼 사랑해>로 바뀌었다. 가까이서 영화를 들여다보자. 번쩍이는 은박 방염복을 입고 고전 SF 영화에 나올 법한 투구를 쓴 두 사람이 화산의 경계를 경쾌하게 걷고 있다. 무한한 호기심이 일렁이는 천진난만한 눈빛을 지닌 둘은 마치 다른 행성에 불시착한 우주인 같다.

새빨간 화염이 포효하는 일촉즉발의 상황. 암석 파편이 하늘로 높이 치솟고, 용암이 비탈을 줄달음질 치며, 회색빛 뭉게구름이 전 세계에 재를 토해내는데도 둘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할 수 있는 한 더 가까이에서 지구가 찢기고 합쳐지는 광경을 관찰하고 싶다는 순수한 욕망으로 넘쳐나기 때문이다. “나는 단조롭고 긴 삶보다 짧고 강력한 삶을 선호한다”고 단언할 정도로 말이다.

활화산의 원초적 분출에 매료된 카티아와 모리스, 화산학자인 두 사람은 부부다. 1960년대 프랑스에서 청년기를 보내며 인류에 실망한 이들은 결혼 후 서로의 첫사랑인 화산을 평생 짝사랑하기로 맹세하고, 지구의 리듬에 맞춰 지구가 정하는 행선지로 나아간다.

두 과학자의 카메라에 기록된 화산 탐구 결과물은 지구의 심장을 뛰게 하고 피를 흐르게 하는 존재를 향한 질문이자 지구를 형성하고 재형성하는 힘에 관한 미스터리의 단초이며, 황홀한 시네마이자 숭고한 시 그 자체다. 그렇다 보니 극한과 광기를 탐미하는 영화감독으로 알려진 베르너 헤어조크도 <인투 디 인페르노>, <불 속의 연인: 카티아와 모리스 크래프트를 위한 진혼곡> 두 작품에 둘을 향한 헌사를 담았다.

사라 도사 감독의 <화산만큼 사랑해>는 둘의 차이에서 생겨나는 위트와 사랑의 확장성에 주목한다. ‘작은 디테일과 연결성’에 이끌려 ‘스틸 카메라로 순간을 담는’ 카티아, ‘하나뿐이고 웅장한 것’에 이끌려 ‘집착하듯 모든 장면을 영상으로 기록한’ 모리스. 서로 다른 두 사람을 엮는 것은 공포를 이기는 호기심이다. 탐사의 열기로 언제나 볼이 빨갛게 익어 있는 두 사람의 발랄한 얼굴, 재를 잔뜩 뒤집어쓰고도 장난기 넘치는 몸짓, 브라운관 출연도 마다하지 않는 스타 과학자의 면면, 생계유지를 위한 화산 밖 일상이 이 영화를 채운다. 덧붙여 생동하는 지구를 담은 유려한 애니메이션이 이들 사이를 촘촘하게 엮는다.

한편, 화산을 사랑하는 일은 파괴를 동반하기에 매혹적이면서 그 자체로 외로움과 슬픔을 동반한다. 폭발은 곧 삶의 터전을 파괴하는 재앙이다. 화산 분출물은 솟구치고 달음질친 다음, 세계의 죽음을 껴안고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린다. 그렇기에 카티아와 모리스의 연구는 필연적으로 화산 활동을 예측하고 경고해 희생을 막는 일이기도 하다. 연구하고, 글을 쓰고, 카메라를 들고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 영화를 만드는 일을 계속하려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화산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사람들과 멀어질수록 오히려 인간을 사랑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화산만큼 사랑해>(2022)

분화구로 전진하기, 이내 삼켜질 걸 알면서도

픽사 단편 애니메이션 <라바(Lava)>는 수면 위아래로 우뚝 솟아오르고, 가라앉기를 반복하며 수천만 년 동안 서로 사랑을 키워 온 두 화산 섬 이야기다. 생김새도, 위치도 다른 둘은 상대가 보이지 않아도, 용암마저 소진돼도 언젠가는 ‘내 사랑’을 만날 수 있길 바라며 지구와 바다, 하늘에 소원을 빈다. 그러던 어느 날 하트 모양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떨어져 있던 둘은 마침내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함께 노래할 수 있게 된다. 지구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함께할 것임을 알기에 더는 외롭지 않을 약속의 노래. I Lava You.

디즈니+에 가입한 이후로 틈만 나면 이 단편 애니메이션을 보았다. 얼마 전 <화산만큼 사랑해>를 만나고 나서는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하와이의 두 화산 섬이 어쩌면 카티아와 모리스 두 부부의 전생 혹은 환생인 것처럼 느껴진다.

“사랑해”라는 말이 도통 낯간지러워 입 밖으로 꺼낸 지 오래다. 죽음과 직결된 심연을 눈앞에 두고도 기꺼이 뒤따르고 앞장서는 사랑, 이에 더해 둘만의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전 인류를 향해 범위를 넓히는 사랑.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힘을 지닌 사랑의 형태를 방금 막 목격했기에 지금까지 겪어 온 내 사랑의 깊이가 보잘 것없이 얕게 느껴진다. 내 앞엔 그런 존재가 영영 나타나지 않을까 봐 지레 겁을 먹고 다시금 말을 삼키게 된다. 타고난 겁쟁이들은 이상하리만치 상상력이 뛰어나서 가까이 다가갈수록 위험천만한 대가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주술을 왼다. 나 같은 이들에게 <화산만큼 사랑해>는 전한다. “미지의 세계는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추구할 대상”이라고.

애틋한 관계를 지켜볼 때면 손바닥이 따끔거리거나 간질거린다. 끓기 시작한 용암이라든가 톡톡 거품을 터트리는 유황이 손금 사이를 지나듯. 카티아와 모리스에게 서로가 그랬고, 화산이 그랬듯이 언젠가 나를 기꺼이 헤맬 수 있게 하는 무언가가 생겨난다면 나는 용기를 내어 그 존재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갈 것이다. 그리고선 표피 아래를 타고 흐르는 잠재력을 모아 보글보글 흥얼거릴 것이다. I Lava You. 상상 이상으로 커다란 무언가가 응축된, 태양을 닮아 이글거리는 검붉은 에너지를 마음에 품고.

 <화산만큼 사랑해>(2022)
OTT 디즈니+
원제 Fire of Love
감독 사라 도사
시놉시스
평생을 화산 연구에 몰두해 온 카티아와 모리스 부부에게 화산이란 그들의 인생 자체다. 들끓고 있는 용암 호수, 화산재로 뒤 덥혀 있는 산 정상과 연기와 가스로 뒤덮인 주변의 풍광 등 이들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위험을 무릅쓰고 촬영한 화산 영상을 보고 있자면 대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비함에 절로 탄복하게 된다. 특히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화산의 근접 영상은 어떻게 촬영했는지 모를 정도로 생동감이 있다. 사라 도사 감독의 자연 다큐멘터리 <화산만큼 사랑해>는 한 프랑스 부부가 남들이 기피하는 화산연구를 진행하는 과정과 서로에 대한 사랑, 헌신을 기록한 헌사이다. 올해 선댄스영화제에서 프리미어로 소개되어올해 최고의 다큐멘터리 중 하나가 될 것이라는 찬사를 받았으며, 실제로 전 세계 영화제에서 11개의 각종 부문에 노미네이트, 그중 6개 부문을 수상하며 찬사에 걸맞은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