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과 스프 고양이와 함께 하기 좋은 날>(2013)

할 수 있는 만큼만

차분한 사람이 부럽다. 불안하고 초조한 내면을 들키지 않는 사람이. 저 사람의 방은 언제나 깔끔할 거야. 아침에 일어남과 동시에 침구 정리를 할 테고, 신선한 원두를 직접 갈아 내려 마시면서 하루를 어떻게 보낼 것인지 천천히 생각하겠지. 좋아하는 카페에 가기 위해 가방을 쌀 때에도 빠짐없이 물건을 챙길 테고, 사시사철 손수건과 핸드로션을 들고 다닐 거야. 약속 시간에 늦는 일이 거의 없고, 늦는다 하더라도 헐레벌떡 뛰어오는 일은 없겠지.

언젠가 싸이월드 일기에 쓴 적이 있다. 나의 생각보다 말이 느렸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나의 생각이 매우 천천히 진전되었으면 좋겠다고. 상대방의 말에 반응하기보다 내 생각에 집중하기를. 그런 사람으로 자라나길 바랐다. 그러나 15년이 지난 지금, 나는 누구보다 분위기에 휩쓸리는 인간으로 자랐다. 그래서인지 자신만의 페이스를 가져가는 사람들이 신기하고 부럽다. 어쩐지 나는 그들이 단정한 날들을 보낼 거라 여긴다. 말끔하고 정돈된 공간에서, 단정한 마음으로 일상을 보낼 것이라고.

<빵과 스프, 고양이와 함께하기 좋은 날>의 주인공 아키코는 그러한 사람처럼 보인다. 홀로 먹을 식사를 준비할 때에도 에이프런을 갖춰 입는 사람. 반찬마다 접시에 내어 담고, 심지어 수저받침대를 사용하는 사람. 수저받침대를 사놓고도 씻기 귀찮다는 이유로 꺼내지 않는 경우가 왕왕 있는 내게, 아키코는 당연한 걸 당연하게 해내는 사람이다. 회사에서 원치 않는 부서 이동을 권하자, 고민하지 않고 퇴사를 결정해버리는 사람. 재료가 떨어지거나 준비가 여의치 않으면 식당 문을 열지 않는 사람. 어떻게든 되겠지, 의 마음으로 살기보다는 자신이 조율할 수 있는 만큼만 하려고 하는 사람.

회의를 앞두고 고민을 하고 있는 신입 직원에게 아키코는 말한다. 좋은 게 좋은 거, 라는 식으로 흘러가게 두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방법은 부딪히더라도 일단은 내 생각을 상대방에게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라고. 단, 마찰을 빚더라도 마음에 앙금은 남기지 말라고. 이러한 태도로 살아간다는 건 생각보다 힘이 든다. 자신만의 페이스로 모든 걸 조절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늘 타인과 관계하고 있고, 때마다 어느 이해관계에 속해있으며, 혼자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고 있으니까. 압도하는 분위기를 뚫고 홀로 꼿꼿해지는 것. 그러나 그 꼿꼿함이 결코 배타적인 모습으로 비춰지는 게 아니라는 것조차, 내가 아키코를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 드라마를 보다 보면 자연히 영화 <카모메 식당>을 떠올리게 된다. 고바야시 사토미와 모타이 마사코의 조합이라 다소 익숙한 느낌을 풍기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두 작품 모두 내게 어떤 정서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좋았다. 마지막 군무 씬은 수양의 춤 같다. 따라 추고 나면 어쩐지 나도 단정한 마음을 품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러나 선뜻 추기는 조금 버겁다. 그러고 보니 진정 수양의 춤 같다.

<줄리 & 줄리아>(2009)

사는 건 매사가 분투

그럼에도 매일이 엉망진창인 듯싶은 날들의 연속. 어쩐지 나아지는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은 기분에 죄여 사는 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그 진창 같은 하루하루를 딛고 살아야 하는 것도 현실. <줄리 앤 줄리아>의 줄리는 일 년간 524가지의 요리를 완성하는 것으로 목표를 정하고 이를 수행하기로 마음먹는다. 초코, 설탕, 우유, 노른자를 정확한 계량에 맞춰 섞으면 크림이 된다는 확실함, 그 확실함이 예측불허인 삶에서 유일하게 안온함을 가져다준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다.

목표를 수행해나가는 과정은 역시나 어렵다. 완수했을 때의 성취감도 분명 있지만, 그건 오래 가지 않는다. 줄리는 살면서 제대로 해낸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삶은 현재형이므로 완전한 실패라는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다고 내세울 만한 성공도 경험해본 적이 없어 그녀는 자주 실패한 기분을 느낀다. 몇 번이나 시도를 했음에도 완성해내지 못하자, 그녀의 남편은 그냥 완성한 걸로 치자고 말한다. 요리 과정을 카메라로 찍는 것도 아니고 블로그에 글줄을 적는 것일 뿐인데도, 줄리는 속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녀의 남편은 블로그를 찾는 익명의 독자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겠지만, 줄리는 자기 자신에게 결백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증명하고 싶었을 것이다. 허투로 하고 있지 않다는 걸. 생닭을 부여잡고 부엌 바닥에 드러누워 엉엉 울게 되더라도, 끝끝내 해내야만 한다고. 하고 싶어서 시작한 일인데, 종내에는 해내야만 하는 거다. 하고 싶다, 가 해내야 한다, 로 바뀌는 순간, 우리는 좌절한다. 이러려고 시작한 게 아닌데.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 싶은.

원대한 숙원이 아니어도, 사는 건 매사가 분투다. 별 일 아닌 척하며 제법 늠름하게 넘어갈 때가 있고, 아닐 때가 있을 뿐이다. 요즘의 나는 최대한 분투하지 않는 방식으로 내 생활을 지키려 하고 있다. 내가 할 수 있을 만큼 매일의 작은 목표를 정하고 완수하기. 그 목표는 대체로 굳이 목표로 설정하지 않아도 되는 수준의 것들이다. 일테면 좋은 향이 나는 입욕제를 넣고 욕조에서 목욕하기. 고양이 털 빗기기(이건 매일 못할 때가 많다). 일어나자마자 침구 정리하기. 잘 때엔 꼭 잠옷을 입기. 정말 별 거 아닌 목록이지만, 요즘은 내가 해내야 하는 하루 목표치를 딱 이 정도로만 잡아두고 싶다. 물론 그보다 더 많은 일들을 완수하고 있음에도, 내가 수행해야 하는 것들이 ‘당연하게’ ‘해내야’ 되는 일이 아니란 것을 스스로에게 알리고자 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그저 그때그때 필요한 성취감을 획득하기만 하면 된다.

역설적이게도, 그런 까닭에 줄리는 프로젝트를 완수해야만 한다. 현재 그녀에게 필요한 성취감을 획득하기 위해서라도. 그러나 만일 목표를 수행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과정 전체를 ‘실패’로 해석하지 않으면 된다. 우리가 분투해야 하는 건 스스로를 성공이니 실패니 하며 단정 짓지 않으려는 마음을 빚어내는 일이다. 함부로 나를 재단하지 않는 마음. 나는 그 마음가짐의 속성 역시 단정함에 가깝지 않나 싶다.

 <빵과 스프 고양이와 함께 하기 좋은 날>(2013)
OTT Netflix
원제 パンとスープとネコ日和
감독 마츠모토 카나
출연 고바야시 사토미, 가나, 미츠이시 켄
시놉시스
출판사에서 일하던 그녀. 돌아가신 어머니의 식당을 처분하려다가 자신만의 가게를 열기로 한다. 메뉴는 빵과 수프. 그 단출함에 고양이 식구가 더해지면서 어느새 삶이 따뜻함으로 가득해진다.

 <줄리 & 줄리아>(2009)
OTT Netflix
원제 Julie & Julia
출연 메릴 스트립, 에이미 애덤스
시놉시스
전설의 프렌치 셰프 ‘줄리아 차일드’ (메릴 스트립). 외교관 남편과 함께 프랑스에 도착한 줄리아는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외국생활에서 먹을 때 가장 행복한 자신을 발견하고 명문 요리학교 ‘르꼬르동 블루’를 다니며 요리 만들기에 도전, 마침내 모두를 감동시킨 전설적인 프렌치 셰프가 되는데…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뉴욕의 요리 블러거 ‘줄리’ (에이미 아담스). 한창 잘나가는 친구들과 잔소리 뿐인 엄마 사이에서 기분전환으로 시작한 요리 블로그. 유일한 지원군은 남편 뿐이지만 전설의 프렌치 셰프 ‘줄리아 차일드’의 요리책을 보며 365일 동안 총 524개의 레시피에 도전하는 그녀의 프로젝트는 점차 네티즌의 열렬한 반응을 얻게 되는데는 성공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