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용호상박 그게 말이 돼?
쏟아지는 말, 여기저기서 솟구치는 이야기
이 이야기는 웃는 법을 잊어버린 한 야쿠자로부터 시작한다. 신주쿠에서 제일 재미 없는 남자, 눈길 한 번에 방긋 웃는 아이도 엉엉 울릴 수 있는 무서운 인상을 지닌 이 남자의 이름은 ‘토라지(虎児)’. 무자비한 세월을 지나왔다. 조직의 중간 보스이자 사채업자로 거리를 쏘다닌다. 빚 받으러 아사쿠사 극장에 간 어느 날, 그는 엄청난 걸 본다. 이름하여 ‘라쿠고’. 부채와 손수건만으로 무대에 홀로 올라 에도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저잣거리의 이야기를 술술 풀어내는 만담 무대다. 이야기에 홀린 그는 채무자를 스승으로 모시기로 다짐한다. 스승에게는 하라주쿠에서 옷 장사를 하는 아들이 하나 있다. 어릴 때부터 라쿠고 천재로 불렸지만, 지금은 라쿠고 세계를 떠나있는 ‘류지(竜二)’. 이 드라마의 프롤로그. 류지가 토라지에게 말한다. “그래도 재밌지 않아요? 전 늘 이런 상황을 이야기로 들려주는 생각을 하는데!” <타이거 앤 드래곤>은 그렇게 발을 뻗는다. 웃길 줄 모르는 남자와 웃길 줄 아는 남자의 만남이 시작됐다. 라쿠고 하나, 옛이야기 쏙 빼닮은 이야기 하나, 라쿠고 하나, 이야기 둘, 라쿠고 하나, 이야기 셋… 잠깐, 세상에 호랑이는 있고 용은 없잖아. 둘이 어떻게 싸우는 줄 우리는 모르는데 용호상박이라는 사자성어, 말이 돼?
밀착 취재 다큐멘터리 <정열대륙> 쿠도 칸쿠로 편 부제는 “평범한 천재의 자극적인 지루함”이다. 34세 극작가, 연출가, 배우, 밴드 기타리스트… 모든 걸 해내느라 잠잘 틈도 없는 남자가 멍하게 화면을 바라보고 있다. 카메라가 다가간다. 내레이션이 겹친다. “대사야말로 그가 그리고 싶은 세계 바로 그 자체다. 살아있는 대사. 설명이 아닌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한숨처럼 흘러내리는 대사. 아무 의미도 없는,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말. 그가 손가락을 멈추고 있던 곳은 이런 대사였다. “응? 에? 아아? 엣?””
비실거리는 몸으로 호텔 침대에 쓰러져 누웠다가 고쳐 앉더니 자기가 쓴 대사에 자기가 낄낄대는 사람. 그렇게 말속에 빠져들어 이야기를 움직이는 사람. 선생님은 되고 싶지 않다는 사람. “천국이나 지옥이나 다 첫 글자는 H야”라는 얼토당토않은 문장을 쓰는 사람. 그 안에 비범한 진실이 담겨 있단 걸 인정하고 싶지 않게 만들더니 결국은 항복시키는 사람. 모든 게 정신없고 골 때린다. 정신 차려보니 나는 벌써 쿠도 칸쿠로, 일명 쿠도칸 드라마에 중독된 상태였다. 그 시작이 <타이거 앤 드래곤>이었다.
이상하고 난잡하다. 방금까지 중요했던 게 순식간에 하나도 중요하지 않게 됐다. 진작 다른 데서 사건은 발생했다. 소문은 퍼지고 있다. 이 패턴이 동시다발적으로 중첩된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딱밤 한 대 때리고 싶어졌다. 그런데 도무지 미워할 수 없다. 그렇게 느끼는 내 스스로가 오싹하다. 세상만사도 지긋지긋한데, 이 드라마에까지 끈덕지게 얽혀버렸다. 하지만 드라마니까 한바탕 웃고 빠져나올 수 있다. “으드득”, “으차차” 소리 내면서.
“텔레비전은 아무 생각 없이 보게 되는 거니까”
드라마 <자만 형사>(2010)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잘생긴 얼굴에 정보량이 너무 많다는 대사 다음 흘러가는 허무맹랑한 대사지만 적어도 나는 이 대사에 쿠도칸 드라마의 정수가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왜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계속 보고 있는가. 도대체 언제까지 볼 셈인가. 작가는 왜 아직도 아무 말들을 쓰고 있는가. 도대체 언제까지 쓸 셈인가. 지금부터 이어지는 내용은 쿠도칸이 쏟아내는 말들의 미로를 떠돌다 찾아낸, 진부하게 말하자면 쿠도칸 작품을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비스름한 것이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작가도, 배우도, 작품도 나이가 든다. <타이거 앤 드래곤>을 정주행하고 난 뒤 모두의 미래가 궁금해졌다면 드라마 <우리 집 이야기>(2021)로 시간을 훌쩍 건너가 보자. <타이거 앤 드래곤>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었던 둘이 일본 전통 연극 ‘노가쿠(能楽)’ 집안의 부자지간으로 변신했다. 그야말로 전통과 현대의 비빔 짬뽕… 정제된 무대와 레슬링의 희한한 만남 같은 여전한 코미디 사이 노화와 돌봄, 죽음을 둘러싼 문제가 슬금슬금 다가온다.
청춘으로 거슬러 가는 방법도 있다. 지금, Y2K는 패션이다. 2000년, 진짜 Y2K는 생존이었다. ‘가오’ 없이, ‘배짱’ 없이는 감히 얼굴을 들이밀 수 없던 시대, 청년들은 희번덕대는 눈으로 뒷골목을 정면 돌파한다. 숱한 마니아를 양산한 드라마 <이케부쿠로 웨스트 게이트 파크>(2000), 재일조선인 정체성을 다룬 영화 <GO>(2001), 탁구 히어로를 꿈꾸는 두 친구의 영화 <핑퐁>(2002), 오지 않는 죽음을 기다리며 시간을 죽이는 청춘 드라마 <키사라즈 캐츠아이>(2002)가 그렇다. 히가시노 게이고 추리 소설도 쿠도칸 세계에서는 콩트가 된다. <유성의 인연>(2008) 세 남매는 복수를 위해 알뜰히 숨기고 황급히 꾸민다. 아기자기한 욕망이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학원 드라마 <미안해 청춘!>(2014), 1987년생 세 남자를 내세워 세대론의 구멍을 엿보는 <유토리입니다만, 무슨 문제 있습니까?>(2016) 까지… 누군가는 변한 세상의 젊은이들 나약해졌다 꼴불견이다 손가락질할지라도, 엉거주춤 달리다 넘어지더라도, 간신히 일어난 모양새가 촌스럽고 어설플지라도, 예측 불가능함조차 예측 불가능한 세계에서 그래도 살아가는 청춘의 얼굴을 작가는 이리저리 기울여 본다.
쿠도칸 작품에 넌더리가 난 사람이라면, 혹은 처음 접한 사람이라면 “이 사람은 여자를 뭘로 아는 거야?”, “너는 지금이 어느 땐데 이렇게 남자! 남자! 남자!들만 득실대는 “빻은” 드라마를 보라고 하는 거야? 내 눈 귀 씻어줘!” 당장에라도 호통칠 수 있단 걸 안다. (나 역시 늘상 그래왔다…) 이렇게까지 남자라는 생명체의 모든 면을 사랑하는 작가가 있었나? 폼 잡는 것뿐만 아니라 헤헤거리면서 얼쩡대는 얄팍한 속내, 징글맞고 추접스러운 면까지 다 까발릴 만큼? 그래서인지 뭔지 아무튼 바보들은 전력으로 사랑을 한다. 예를 들면 에도시대 리얼 사이키델릭 퀴어 영화 <한밤중의 야지 키타>(2005), 알고 보니 사랑한 여자 모두 자신이 체포해야 하는 범죄자인 슬픈 금사빠 형사의 드라마 <자만 형사>(2010)가 그렇다.
그래서 준비한 비겁한 변명과 멋쩍은 항변. 나는 유별난 여자들을 사랑한다. 올해도 쿠도칸 드라마를 기대하는 이유는 깜찍하고 때로는 이상해서 징그럽기까지 한 여자들 때문이다. 기상천외한 이야기 속에선 쇼와 아이돌 출신 관록 있는 배우부터 풋풋한 신인 배우까지 이제까지는 볼 수 없었던 유난스러운 표정으로 결정적 순간에 먼저 들이받는 욕망에 솔직한 여자가 된다.
‘아마노믹스’라는 신조어가 탄생할 정도로 일본 지역 경제 부흥에 일조한 아침 드라마 <아마짱>(2013)은 해녀 이야기이자 아이돌 이야기이면서 3대에 걸친 모녀의 이야기다. 일단 기타산리쿠 바다에 빠져 보시라. 헤어 나오기 쉽지 않을 것이다. 어느 날 <나는 주부로소이다>(2006)의 주인공 ‘미도리’ 몸에는 일본의 대문호 나츠메 소세키의 영혼이 빙의한다. 주부 생활은 샘솟는 창작의 원천이다. 짝사랑의 열병으로 담배 연기를 도쿄 곳곳에 내뿜는 <맨하탄 러브스토리>(2003)의 택시 드라이버 ‘노부코’는 <감옥의 공주님>(2017)에서 불륜을 저지른 남편을 칼로 찔러 수감된 ‘바바 카요’가 되어 여자 교도소 동기들과 함께 우당탕 복수극을 꾸민다. <우리 집 이야기>(2021) 간병인 ‘사쿠라’는 뻔뻔함을 숨기지 않는다. 당당하게 요구하고 받아낸다. <키사라즈 캐츠아이>(2002)에 ‘미레이’ 선생님 없었다면, <미안해 청춘!>(2014)에 ‘리사’ 선생님 없었다면, 반복해서 등장하는 감초 배우들 없었다면 별 볼 일 없는 남자들 이야기는 볼썽사나운 늪에 영원히 잠겨 절대 물 밖으로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웃기면 그만이냐! 그만 아니라니까!
예기치 못한 순간에 눈물이 날 때가 있다. 나는 “또 당했다! 이 사람 정말 얄밉고 치사하잖아! 너무 잘 쓰잖아! 좋아한다고 절대 인정 안 할 거지만! 나는 그런 사람 아니니까!” 그런 말을 귀신에라도 씐 양 줄줄 읊는다. 라쿠고가 부채 한 자루로 강에 배를 띄우듯, 극작가 쿠도 칸쿠로는 노트북 한 대로 비겁한 세상에 겁쟁이들이 속삭이는 말을 띄우는 사람이다. 이야기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아무것도 될 필요 없다. 그 자체로 이미 무엇인가가 되었다. 다가오는 8월, 디즈니+에서 작가의 신작 드라마 <계절이 없는 거리>를 곧 만날 수 있다.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 <도데스카덴>의 원작이기도 한 동명 소설의 시공간을 현대로 옮겨 왔다. 나는 이번에도 빼꼼 눈을 흘기며 기대한다. 아직 세상은 망하지 않았고, 아이러니는 곧 깨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속된 것은 영원히.
OTT 넷플릭스
원제 タイガー&ドラゴン
연출 카네코 후미노리, 카타야마 오사무
각본 쿠도 칸쿠로
출연 나가세 토모야, 오카다 준이치, 니시다 토키유키
시놉시스
야쿠자인 주인공이 ‘라쿠고’ 집안의 제자로 들어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젊은 야쿠자 조직원이 사채를 쓴 라쿠고 만담가의 제자가 된다. 한편, 만담가의 아들은 패션 센스도 없는 주제에 하라주쿠 뒷골목에서 옷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