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재민, <1보다 크거나 작거나>, FHD 비디오, 28분, 컬러/사운드, 2018 @ 탈영역우정국

소년에게 발레를 하게 된 이유를 물었다.
“아버지께서 어렸을 때 발레를 너무 하고 싶으셨는데, 할머니가 무조건 남자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해서 마음속으로만 발레를 하고 싶어 하시다가, 내가 나와서, 남자니까 시켜보고 싶다고 하셔서 제가 하게 되었어요.”
검은색 타이즈에 흰색 슈즈를 신은 소년들이 나풀거리며 나무 바닥 위로 튀어오른다. 단련된 몸에 비해 홍조 띤 얼굴의 소년은 자신의 동작을 끝내고 다음 포지션에서 가쁜 숨을 몰아쉰다.
“제가 아직 빠릿빠릿하게 못 따라가고 하니까 선생님들이 더 채찍질을 하셨는데, 그런 순간이 힘들었지만 계속 참고 아버지만을 생각하면서.”
신정균 작가의 영상 작품 <étude> 중에서 발레하는 소년의 이야기다. 이 작품은 피아노, 성악, 한국무용, 발레를 하는 10대 소녀 소년들의 연습 현장과 인터뷰가 교차하는 형식이다. 여러 에피소드 중에서도 발레하는 소년의 말이 마음에 박힌다. 그리고 소년의 아버지에 대해 생각한다. 아들에게 발레를 시키고 싶다는 40대 남자의 소년시절을, 발레리노를 처음 본 순간의 두근거림을 상상해본다. 아름다운 몸짓들을 마음에 품는, 어린 남자아이를 떠올려보는 것이다.
이어서 보게 된 차재민 작가의 영상 작품 <1보다 크거나 작거나>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연기 수업을 보여준다.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어디가 슬퍼야 슬픈 연기를 할 수 있냐고 물었을 때, 아이들은 일제히 큰소리로 “마-음!”이라고 답한다. 그런데 적극적인 아이들 틈에 조용한 아이가 하나 있다. 입을 다물고 있는, 숨을 꼭 참고 있는 것 같은 남자 아이. 개별 수업 때 선생님이 묻는다. 

“슬픈 게 무엇인 것 같아?”
“…”
“지금 마음이 어때요?”
“… 슬프진 않아요. 그냥 그래요.” 

아이가 아무 대답 없었던 순간에 주목한다. 단순히 머뭇거린 것이 아니라고 느낀다. 아이는 선생님의 의도를 따라가는 대신에 자신의 속마음을 아주 천천히 들여다본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지금 슬프지는 않다’고 솔직하게 답한다. 슬픔의 연기를 끌어내보려는 선생님의 노력에도 아이는 결국 자신이 알고 느끼는 것에만 답을 하고, 잘 모르는 것에는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다. 아이를 보면서 진짜 마음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한다.
그리고 상상한다. 발레 소년과 그의 아버지 그리고 슬프지 않은 남자아이의 세계가 하나로 겹쳐지는 순간을, 그들이 첫 대면의 순간에 품었던 투명한 마음들을. 하지만 그와 동시에 모든 것이 반복될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관계 나 과정들이 유사하게 흘러가고, 그 마음이 언젠가 변해버릴 것만 같은 예감이 들면서 교집합의 세계는 쓸쓸해진다.
실체는 없다. 하지만 과정이 있다. 마음을 지나간 무엇은 사라져버리지만 그것이 지나간 통로는 남는다. 너무 뻔한 반복이지만 수많은 통로의 흔적들은 신비한 문양을 남긴다. 우리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을 알지만 뭔가가 마음을 통과하는 그 순간을 반복한다. 결국 과정 중에 있는 것이다. 

에드워드 양의 영화 <하나 그리고 둘>에서 8살 양양은 아빠가 선물해준 카메라로 수 많은 사람들의 뒷모습을 찍는다. 그리고 그 사진들을 현상해서 한 장을 삼촌에게 준다. 

“이건 나잖아. 내 뒤통수네! 이건 뭐하러 찍었니?”
“삼촌은 뒤를 못 보니까 내가 찍었어요.” 

또다시 새로운 마음을 품는다. 이 거대한 역할극 속에서 예견된 결말을 안다 하더라도 마음에 귀를 기울인 채 매일 고민하고, 선택하고, 반응하고 싶다. 언젠가 스스로의 뒷모습을 보게 될 날을 상상하며, 사라질 것들의 궤적을 성실하게 기록하고자 한다. 영원히 이 과정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기 때문이다.

《기울어진 숨》
기간
2019년 10월 5일 ~ 10월 27일
장소 탈영역우정국 1층, 2층
기획 조지현
참여 작가 김영글, 뀨르와 타르, 림배지희, 신정균, 차재민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19 시각예술 창작산실 전시지원 선정전시)일상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심리적 기류와 감정적 충돌을 ‘권력‘ 개념으로 명명할 수 있을까? 우리는 가족, 연인이나 친구, 상사와 동료, 스승과 선후배 등 관계를 맺을 때 특정한 역할 기대(role expectations)심리를 갖는다. 이러한 역할 기대는 습관적인 형태로 고착된 관계에서 발생하며 심리 권력의 주요 촉발요인이 되기도 한다. 전시는 개인적이고 내밀한 체험에 그치는 경우가 많아 보편적인 문제로 설득력을 얻기가 쉽지 않은 심리 권력 문제에 주목하여 일상적 관계에서 벌어지는 은폐된 권력 문제에 대해 재고하길 제안한다.출처- 탈영역우정국
http://ujeongguk.com/so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