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은 칠흙같이 어두웠고 나는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작가의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았다. 작가님은 누워도 된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나는 아직 잘 알지 못하는 공간에서 눕는 것이 어려워 가만히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잠시 후 저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가 조금은 빨리 진심을 말하고 있어서 ‘원래 진심은 마지막에 나오지 않나.’하고 생각했던 거 같다. 그 다음 목소리는 다른 이에게 쉽게 내보이기 어려운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목소리 틈 사이로 숨을 쉬었다. 그리고 다음 목소리도 묵직한 단어가 가득한 문장을 진심인 것처럼 발화하였다.

작가에 의해 공간에 들어오는 빛들이 제한되었고, 사운드 장치를 통해 목소리가 나오는 방향과 그것의 멀고 가까움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제한된 빛과 목소리들로 공간의 크기나 질감을 알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곳이 스크린이 제거된 영화적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간에 들어서면 일상인 것들이 지워지고 나는 목소리를 경험하는 사람이라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 같다. 목소리들은 공간을 배회하고 있었고 나는 그런 목소리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메시지를 내가 수신할 수 있는 것인지 생각했다. 그들이 생각하는 수신자가 내가 아닐 수도 있겠지만, 어둠 속에서 나는 내가 수신할만한 목소리를 찾고 있었고 계속해서 놓치고 있었다.

작가의 지난 전시《영적인 탐구 여행사 ,두산아트센터》에서 사람들은 작가가 설치한 각기 다른 12개의 방을 함께 이동하였다. 12개의 방 중 한 방에는 광목천들이 걸려있었다. 거기에는 터전을 잃어버린 집창촌 여성들의 문장이 적혀있었다. 사람들은 그곳에 머물며 잠시나마 그 문장들을 읽거나 헤아리려 했던 것 같다. 마지막 방은 테이블에 편지들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편지들은 실재로 한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삶의 부분과 마음을 전하기 위해 쓴 편지였고 발신인과 수신인이 지워져 있었다.

사람들은 마지막 방에서 각기 다른 편지 중 하나를 선택해 그에 대한 답장을 썼다. 각기 다른 곳에서 발생한 문장과 문장이 빛을 주고받았고 그 빛이 우리의 눈에 보일 수 있도록, 작가는 장소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그날 자신이 본 빛과 닮은 문장을 가지고 답장을 써 내려갔을 것이다. 오늘 내가 들은 목소리들은 그들이 답장한 편지의 부분 부분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목소리들이 발화하는 문장들은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말들이라기보다, 진심을 전하거나, 하루의 끝에서 삶을 다시 바라볼 때 발생하는 문장들이 많았다. 나는 그것이 유령의 말과 많이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유령들은 일상에서 지워져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진심을 전하기 위해 나타난다. 보이지 않던 저쪽의 세계가 이쪽에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들의 메시지는 삶이 뿌리째 뽑혀진 자국을 이야기 하는 것이 많아, 그 무게가 유령들보다 무거울 때가 많다. 그리고 이때 우리는 유령을 경험한다.

전시장 밖으로 나와 집으로 걸어가면서 나는 그동안 내가 만난 유령들을 생각했다. 지금, 여기에서 사회적으로 지워졌거나 마치 유령인 것처럼 존재하는 사람들, 유령이 되기로 결심하고 제도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아직은 유령이 아닌, 미래의 유령들. 이들의 메시지는 작가가 전시장에 걸어놓은 문구처럼 ‘들리지만 들리지 않고,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다.’. 작가는 장소를 만들었고 그곳에 이들의 메시지로 가득한 허공을 펼쳐 놓았다. 스스로가 아직 유령이 아니라고 믿는 나는, 절박함을 감추고 진심을 내어 보이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며
물에 밥을 말아먹었다. 밥알이 아이의 새 이빨처럼 하얗다.

《멀리까지 여행하는 방》
기간
2019년 10월 10일 ~ 10월 19일
장소 서대문구 창천동 52-101 4층
후원 <멀리까지 여행하는 방>은 수십 통의 편지로부터 비롯된 전시입니다. 2018년 2월 두산아트센터에서 열렸던 <영적인 탐구 여행사>의 답장 같은 전시로 세 번에 걸쳐 각기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열립니다. 방 안에 들어가는 것이 어떻게 여행이 될 수 있을까요? 각기 다른 세 개의 방은 어떻게 이어지게 될까요? 이 여행에서 우리는 무엇을 마주하게 될까요?
출처 – <멀리까지 여행하는 방> 페이스북 페이지
https://vo.la/Y6n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