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부르는 노래
최근 『항구의 사랑』이라는 장편소설을 편집했다. 소설은 작가가 된 ‘나’가 10대 시절 항구도시 목포에서 겪은 사랑의 체험들을 되짚어 보는 이야기다. 2000년대 초반, 아이돌에 열광하던 소녀들이 아이돌 그룹의 멤버로 남X남 커플을 주인공으로 하는 팬픽을 쓰고, 그 팬픽을 쓰는 10대 소녀들 사이에서 동성 친구를 사랑하고 커플이 되는 현상이 번져가던 시기.
소설에는 그 시절 ‘동년배’들을 깜짝 놀라게 만드는 디테일이 여럿 등장한다. 조성모를 주인공으로 팬픽을 썼던 ‘준희’나 god의 팬으로 손호영의 친척이 다니는 교회까지 알고 있는 ‘민지’ 같은 친구들을 묘사할 때.
이 소설을 읽으며 ‘그때의 나’를 떠올리는 건 자연스럽다고 말하기 무색할 정도로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의 10대 시절에 등장한 아이돌은 동방신기였다. 같은 반 친구들이 동방신기를 향해 뜨겁게 사랑을 보낼 때 나도 곁에서 잔불을 쬐었다. 나는 내가 한 번도 누군가를 향해 열광해 본 적 없다고 믿었는데, 그때, 잘생기고 해사한 아이돌을 보고 두근거리고 출연하는 요일에 맞춰 TV 채널을 맞추고 라디오를 들었던 것이 최고 온도라면 이제는 아이돌을 좋아했다고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이왕 하는 김에 정확히 인정하자면 나의 아이돌은 동방신기가 아니라…… SS501이었다. SS501로 인생의 아이돌을 정한 이 사랑은 후에 내 삶의 드리운 전반적인 사랑의 태도를 예언한다. 그러니까 나는 언제나 조금 늦게 빠진다. 그리고 어디라도 가여워할 구석이 있는 남자를 좋아한다. SS501은 동방신기가 팬들의 사랑을 독차지한 후에 등장했으며 늘 동방신기보다 대중적 인지도가 조금씩 못 미쳤다. SS501 중에서도 가장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던 ‘규종’이 최애 멤버였다고 말하면 두 번째 사랑의 조건을 좀 더 뒷받침하는 증거가 될까…….
이제야 ‘좋아했다’고 말해 보는 노래. 그리고 CD를 사서 들었던 유일한 시기의 앨범. 「Snow Prince」가 수록된 SS501의 싱글 앨범 「2nd SS501」이다. 이 앨범에는 타이틀곡인 「Fighter」, 「Snow Prince」 이외에도 「하얀 사람」, 「In Your Smile」이라는 수록곡이 있는데 모든 곡을 정말 좋아했다. 항상 동방신기보다 부진하던 SS501이 마침내 이 앨범으로 대박이 나고 MBC 예능을 하고(「깨워줘서 고마워」)……. 아니 실은 SS501이 대중적으로 대박이 나거나 말거나 그들의 데뷔 직전을 다룬 다큐 예능부터 좋아하긴 했지만(「M pick!」)…….
『항구의 사랑』의 ‘준희’가 조성모를 좋아하는 동안 한 여자를 좋아하게 되는 강렬한 경험을 하듯, 나에게도 오래 기억하는, SS501의 노래를 좋아하는 동안 일어난 일들이 있다. 장편소설만큼 긴긴 이야기는 아니지만 종종 떠올리면 애틋해지는 장면들. 새 학기에 친해진 친구에게 “아침에 만나서 같이 갈래?”하는 문자를 받던 순간. 하교길에 함께 「Snow Prince」를 흥얼거리던 장면. 뒤이어 온 친구가 “무슨 노래야?”하고 물었을 때 옆에 서 있던 친구가 “화진이가 좋아하는 노래야.”하고 대답해 주던 것들. 마음을 주고받고 친구가 되던 순간들.
10대 시절엔 늘 혼자가 될까 겁이 났다. 운이 좋게 삼삼오오 무리지어 친하게 지내다가도 이유도 없이 혼자 나동그라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는 왜 혼자일까, 계속 혼자이려나, 하는 고민이 끝도 없이 지속되었던 때. SS501이 「Snow Prince」를 부르던 시기에 나타나 준 친구들 덕분에 그때의 불안이 상당 부분 해소되었고, 그들은 지금도 내 곁에 있다. 10대 시절 만난 한 사람이 장편소설 한 권을 쓰게 하듯, 10대 시절의 노래 한 곡이 돌아보게 하는 우정의 역사도 있는 것이다. 지금의 나에겐 노래가 준 영향 못지않게 친구들이 불어넣어 준 영향이 있고, 그것들은 서로 뗄 수가 없다. 하나인 듯 여럿이고, 따로인 듯 뭉쳐진 ‘나의 이야기’다. 그 시절 오빠들은 사라지고 스러져도 여자아이들의 사랑과 우정은 이야기가 되어 남는다. ‘인생의 노래’ 선곡 기준은 그것이었다. 노래를 듣고 자란, 우리가 지닌 이야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