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와 손끝으로 듣는 노래
책을 읽는다는 건 그 책을 경험하는 일이다. 책 속에 인쇄되어 있는 글자들뿐만 아니라 그 책이 가진 무게, 소리, 감촉, 크기 등과 같은 물성 자체도 우리가 한 권의 책을 읽고 기억할 때 생각보다도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뜻이다. 수십 년 동안 개인 창고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다가 발견되어 작업실에 수선을 받으러 온 18세기 철학책은 낡을 대로 낡은 모습보다는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피어오르던 먼지와 곰팡이의 냄새로 읽힌다. 4~5세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어느 필본서 역시 그 내용보다는 몇 세기가 지났어도 여전히 놀랍도록 단단하고 매끄러운 표지의 벨륨(독피지) 감촉으로 기억한다. 사전 특유의 얇고 가벼운 종이가 넘겨지며 만들어내는 청아하고도 건조한 소리는 지금도 ‘사전’하면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감각이기도 하다. 이처럼 한 권의 책을 경험한다는 건 그 책을 온 감각으로 기억하게 되는 일이다.
음악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저 귀로만 들었던 노래들을 걷어내고 내가 정말 가슴 속 깊이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는 노래들을 떠올려보니 그 선택들은 언제나 듣기만 한 음악이 아닌, 다양한 감각들로 경험하고 기억하고 있는 노래들이더라. 이를테면 넬의 ‘기억을 걷는 시간’처럼.
이 노래를 찾아 들을 때면 아직까지도 내가 기억하고 있는 2012년의 양재천이 온몸의 감각으로 함께 연주된다. 12살의 사춘기보다 더한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고 있던 27살의 늦은 봄, 당시 나는 양재천 근처에 살고 있어서 해가 지면 답답한 마음을 안고 자전거를 끌고 나가 천을 따라 한참을 달리며 방황을 하다 돌아오곤 했다. 그때 가장 많이 들었던 노래가 ‘기억을 걷는 시간’이었는데, 그래서인지 이 노래는 그때의 풍경을 기억하고 있다. 아니, 그때의 풍경은 이 노래를 간직하고 있다. 어딘가 살짝 비린 듯 아직은 선선한 저녁 양재천의 물 내음과 바람 내음, 자전거 페달을 밟다 보면 내 발목을 스치던 잡초들의 따가운 느낌, 노래 박자를 맞추며 손가락으로 가볍게 톡톡 건드리던 자전거 고무 손잡이의 단단한 감촉, 이어폰 너머에서 노래와 함께 중첩되어 들려오던 산책 나온 사람들의 말소리와 웃음소리까지. 내게 ‘기억을 걷는 시간’은 귀로 듣는 노래임과 동시에 코로 맡는 노래이고, 피부로 느끼는 노래이고, 손가락 끝으로 닿을 수 있는 노래다.
1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이제 더는 그때처럼 봄날을 방황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도 이 노래를 들을 때만큼은 당시의 모든 감각이 선명해지면서 어김없이 여전히 방황하며 자전거로 봄밤의 양재천을 달리는 27살로 돌아간다. 이상하게도 그게 매번 참, 속상하고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