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철, [나에게 쓰는 편지], 1991
어린 시절부터 책 읽기만 좋아하던 나는 음악을 잘 듣지 않았다. 사람에 따라서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거나 공부할 때 집중이 잘 되는 경우도 있다지만, 나는 조용한 골방에 틀어박혀 책장을 펼치고 온전히 그 속으로 빠져들 때만 행복을 느끼는 아이였다. 그렇다 보니 사람들의 대화 소리나 티브이 소리는 물론 음악 소리까지도 독서에 방해가 되는 일종의 소음으로 다가왔다.

이토록 음악 듣기를 꺼려하는 내가 신해철과 N.EX.T의 노래만은 줄줄이 외우고 있다. 이는 결코 내 의지가 아닌 두 살 터울 오빠의 영향이었다. 신해철의 예명인 ‘크롬’의 시민이라는 뜻으로 온라인상의 아이디마저 ‘cromian’이라고만 쓰는 오빠는 그의 열렬한 팬이었고, 항상 그의 음악을 틀어두고 살았다. 덕분에 나 또한 어릴 적부터 신해철이 만들고 부른 노래를 들으며 자랄 수밖에 없었다.

열 살 무렵, 가족끼리 여행을 떠나는 차 안에서도 오빠는 신해철의 정규앨범을 내내 틀어두었다. 나는 그 노래들을 듣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잠에서 깨어났을 때, 신기할 정도로 정확하게 들리는 노랫말에 그만 상체를 벌떡 일으켜 앉았다.

난 잃어버린 나를 만나고 싶어
모두 잠든 후에 나에게 편지를 쓰네

노랫말 하나하나가 정확하게 마음을 뚫고 들어온 경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뒤로 이어지는 가사들은 – ‘고흐의 불꽃같은 삶’, ‘니체의 상처 입은 분노’, ‘은행구좌의 잔고 액수가 모든 가치의 척도인가’ – 그 뜻을 모르는데도 귀에 또렷이 들어와 박혔다.

나는 오빠에게 이 노래의 제목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오빠는 곧장 <나에게 쓰는 편지>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 제목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편지’라는 것은 발신인과 수신인이 존재하는 까닭이었다. 실재하지 않는 대상을 향해 편지를 쓰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발신인과 수신인이 같은 경우는 존재하지 않았다. 한데 내가 쓰는 편지의 대상이 ‘나’라니, 그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나는 오빠에게 ‘나에게 어떻게 편지를 쓰지?’ 라고 다시 물었다. 내 물음에 오빠는 아무 대답하지 않았고, 앞에서 운전을 하던 아버지가 ‘철학적인 의미겠지’라고 말했다. 겨우 열 살이었던 나는 철학이 무엇인지, 고흐, 니체, 은행구좌, 잔고액수, 척도라는 것들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내 머릿속에는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홀로 편지를 쓰는 사람의 모습이 선연히 그려졌다. 그는 왜 자기 자신에게 편지를 쓸까? 그 사람이 쓰는 편지의 내용은 무엇일까? 편지를 쓸 때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 내 안에 수많은 질문이 떠올라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매일 이 노래를 반복해 들으며 가사를 외우고 따라 불렀다. 그리고 밤마다 일기장 대신 편지지를 꺼내고 그 앞에 앉아 있었다. 나는 나에게 어떻게 편지를 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와 동시에 나는 알고 싶었다. 나에게 편지를 쓰는 사람에 대하여. ‘소설가는 알고 있는 것을 쓰는가. 아니다. 알기를 원하는 것을 쓴다. 그가 알기를 원하는 것은 알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한 소설가 이승우처럼(⟪소설가의 귓속말⟫, 은행나무), 내가 알기를 원하나 알 수 없는 ‘나’에게 편지를 써나갔다. 그렇게 시작된 ‘나에게 쓰는 편지’는 점차 소설이 되어갔고, 그로 인해 나는 결국 소설가가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