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mundo Sodre, [A Massa], 1980
사진을 찍을 때는 음악을 듣지 않는다. 세상을 담아내는 사진가로서 나에게는 내가 자리하고 있는 주변의 모습뿐만 아니라 귓가에 들려오는 그 모든 소리 또한 중요하기 때문이다. 온전히 오감이 내 앞에 펼쳐진 세상과 조화로운 하모니를 만들어내기를 원하기에, 내가 카메라를 들고 있다면 그것은 음악을 듣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내가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어린 시절부터 2천 장의 시디를 모았을 정도로 나는 음악에 미쳐 살았다. 지금은 부끄러운 과거이지만 가수의 꿈을 꾸며 음반도 내고 홍대 등지에서 공연을 하며 활동했던 적도 있다. 어린 시절에는 당연히 가요밖에는 몰랐지만, 어린 나이에 해외로 나가 살게 되면서 처음 외국의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미국에서 접하게 된 음악이야 세계적으로 인기가 있는 팝 음악이었지만, 중남미의 나라 온두라스에 살면서 중미권의 음악을 만나게 된 것은 문화적 충격이었다. 우리의 가요가 그러하듯이, 세계의 다양한 지역에는 그곳만의 멋진 음악이 있다는, 그 당연한 사실을 나는 그때 처음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세계를 여행하는 사진가의 삶을 살게 되면서, 지구 반대편의 다양한 장소들을 홀로 방랑하는 나에게 새로운 문화를 익힌다는 것은 또한 새로운 음악을 듣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쿠바에 갔을 때 아바나의 거리에서 만났던 호객꾼들은 나에게 말하곤 했다. ‘오늘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공연이 있다구! 내가 표를 구해줄 테니 어서 따라와!’ 있지도 않은 공연이 있다며 거짓말을 하고는 전혀 다른 공연장에 사람을 데려다 놓는 것이 그들의 방식이었다. 넘어가진 않았지만 그 친구들이 밉지는 않았다. 매일 같이 만나다 보니 나중에는 오히려 친해져, 다른 다양한 쿠바 뮤지션들의 음악을 듣고는 했다. 한번은 한 레스토랑에 손님이 나 혼자뿐인데 10명이 넘는 그룹 밴드가 열심히 공연을 해주어 미안한 마음에 팁을 두둑이 남겨주었던 적도 있다. 덕분에 나는 다음날을 굶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넓어지면서 소위 월드뮤직이라고 부르는 이런 다양한 음악들에 지식을 가지게 되었지만, 진정 내가 그 음악을 좋아하고 즐겨 듣게 되는 것은 본고장을 방문한 다음이었다. 쿠바를 방문하고 나서야 나는 쿠바의 음악을 즐겨 듣게 되었다. 아르헨티나에서 그 유명한 탱고를 만났을 때도 그랬다.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Adios Nonino’는 예전부터 좋아했던 노래였지만,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거리를 내 두 발로 걷고 나서야, 거리의 탱고 댄서들이 추는 그 현란한 스텝은 두 눈으로 보고 나서야, 나는 진정 그 음악을 사랑할 수 있었다. 어떤 면에서 본다면 나의 여행은, 세상의 음악을 만나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남미를 여행하던 2017년에 나는 브라질의 살바도르라는 도시에 닿았다. 음악 좀 듣는 사람이라면 브라질이라는 말에 즉각적으로 보사노바를 떠올릴 것이다. 나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아서, 다음 목적지인 리우데자네이루에 대한 기대로 설렘은 한참 크게 달아올라 있는 상태였다. 카를로스 조빔! 이파네마에서 온 소녀! 그 장소에 직접 간다니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이곳 살바도르에서도 나를 감동시킬 음악이 기다리고 있었을 줄이야. 그 모든 것은 첫날 거리를 걷다 우연히 만나게 된 작은 레코드샵에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갈색의 털을 지닌 고양이가 낮잠을 자고 있는 모습에 끌렸다. 뒤를 바라보니 작은 입간판이 나와 있는데, 다양한 브라질 음악을 팔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어디를 가든 작은 레코드 가게에 들르는 것은 사진가로서 세상을 여행하는 내가 부리곤 하는 작은 사치였기에, 이 또한 인연이라는 생각에 가게 안으로 들어가보게 되었다. 손님 한 명 없는 텅 빈 가게 한가운데는 작은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었고, 가운데 카운터에 앉아있던 노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중년도 아니었던 한 백인 남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가게의 주인, 랜디였다.

스페인어는 조금 하지만 포르투갈어에는 어려움을 겪고 있던 나였기에 어떻게 대화를 이어갈지 살짝 고민이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랜디는 미국인이었다. 당연하게도 영어를 잘했고, 음악에 대한 관심이 서로 비슷한 점이 많아서 우리는 순식간에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미국인이 브라질에서, 그것도 살바도르에서 음반 가게를 하고 있다니 무척 특이하다고 생각했는데, 듣다 보니 그의 인생 자체가 한 편의 소설이었다. 한때는 뉴욕의 잘나가는 음반사에서 A&R로 일했었지만, 살바도르에 방문하고는 이곳의 음악에 반해 계속 다시 찾아오게 되었고, 결국 사랑하는 여자까지 만나 여기 정착해 음반샵을 차리게 되었다는 그런 동화 같은 이야기였다.

아름답게 느껴지는 그의 이야기와 달리 그의 음반 가게는 수입이 그리 좋지 못한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온라인으로 음악을 사는 시대가 된 것은 브라질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와중에 유난히 눈에 띄는 음반들이 있었는데, 부틀렉 음반처럼 보이는, 어설프게 프린트한 음반 커버와 공시디로 구워낸 듯한 음반들이었다. 하지만 바로 이 음반들이 랜디의 비장의 무기이자 이 레코드샵의 존재 이유였다. 그 음반들은 이제 더이상 구하기가 어려운 이 지역 뮤지션들의 과거 명반들이라고 했다. 랜디는 이곳에 수십 년을 살면서 지금은 잊혀진 이 뮤지션들과 교류를 쌓게 되었고, 그들의 허락을 받아 이젠 구할 수 없게 된 그들의 레코드판을 변환해서 시디로 제작해 판매하게 된 것이다. 그의 추천 덕분에 나는 여러 장의 음반을 구입하게 되었다. 돈만 있다면 전부 사오고 싶을 만큼 정말, 음악이 다 좋았다.

알고 보니 살바도르야말로 브라질 음악의 고향이었다. 이 지역의 전통 음악을 츌라(Chula)라고 하는데, 츌라 음악에서 삼바가 탄생했고, 삼바에서 보사노바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살바도르는 과거 포르투갈 식민지 시절 아프리카에서 많은 흑인 노예들이 실려 왔던 곳이었고, 이곳에 정착한 흑인들이 만들고 부르던 노래가 츌라가 된 것이었다. 츌라 음악의 전설적인 뮤지션들이 이곳에서 활동했지만 여느 음악계가 그러하듯이 과거의 뮤지션들은 잊혀지고 그들은 모두 늙었다. 한 명 두 명 지난 몇 년 사이 세상을 떠나고 있다며 랜디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죽기 전에 그들의 음악을 세상이 다시 알아준다면 좋을 것을.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같은 일이 살바도르에도 벌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날을 계기로 나는 랜디와 친해지게 되었고, 그는 마을 주변의 여러 뮤지션들을 내게 소개해주었다. 후에 소개받은 그의 아내는 가게 문을 자꾸 닫고 나와 놀러 다니는 랜디를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보는듯 했지만, 나에게 시디 몇 장 판 것이 최근 최대 매출이라며 들뜰 대로 들떠있는 랜디를 막을 수는 없었다. 조금은 짠해진 마음에 나는 밤이면 그에게 맥주 한잔을 샀다. 술잔을 기울이며 브라질과 브라질 음악을 이야기하던 그 시간들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랜디는 늘 말하곤 했다. 브라질 사회의 모든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하지만 음악 하나는 최고라고. 그 음악이 최고니 어쩔 수 없다고 말이다. 미래가 암울해 보여도 이곳에서 음반샵을 열고 닫고 있는 랜디의 삶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한 문장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의 가게에서 유난히 나의 눈길을 끌었던 음반 재킷이 있었다. 파마머리의 흑인 뮤지션인데 강력한 카리스마가 사진 너머로 느껴져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는데, 그가 바로 레이문도 소드레(Raimundo Sodre)였다. 그는 1980년 ‘A Massa’라는 히트곡을 내고 당시 국민 가수급 인기를 누렸던 가수라는데, 안타깝게도 그 인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당시 브라질을 장악한 독재정권에 비판의 목소리를 냈던 그는 정부의 탄압을 받게 되었고 결국 음반 활동도 어려워져 해외를 돌게 되었다는 것이다. 안타까운 마음에 그가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니 다시 살바도르에 돌아왔다는게 아닌가. 게다가, 며칠 후 한 축제에서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고 했다. 그의 사진을 꼭 담고 싶어서 랜디에게 부탁을 했고, 공연을 몇 시간 앞두고 나는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예전 같은 인기는 없어진 지 오래지만 여전히 당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던 남자. 잠시 대화를 나누며 그의 사진을 찍었고, 공연까지 같이 보게 되었다. 홍대 거리의 버스킹 공연처럼 작은 무대에 초라한 행사였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최근에 발표한 신곡들은 그러저러한 반응이었다. 확실히, 아주 좋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 곡으로 그가 ‘A Massa’를 부르기 시작하자 얼마 되지 않는 관객들이 모두 박수를 치며 환호하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1980년대를 살았던 브라질 사람이라면 이 노래를 모를 수 없을 거라고 랜디는 말했다. 과연 그의 말은 사실이었던 듯 하다. 뜨거운 반응과 함께 공연은 끝났다. 살바도르를 떠나며 받은 가장 소중한 선물이 되었다.

며칠 후 랜디에게서 이메일이 왔다. 그가 전국적 스타덤에 오른, ‘A Massa’를 전국구 티비에서 처음 불렀던 공연 실황의 유튜브 영상이었다. 링크를 눌러보니 내가 만났던 모습보다 훨씬 젊은 소드레가 있었고, 그는 수만 명의 관객 앞에서 노래하고 있었다. 빛나는 시절, 빛나는 노래. 모두 꿈처럼 옛날 일이 되어 마치 무슨 일이 있었냐는듯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나는 만났다. 음반 가게의 랜디. 살바도르의 소드레. 어쩌면 과거를 붙잡고 사는 것처럼 보이는 미련한 사람들. 그러나 나처럼, 과거를 잡고 있는 사람들 덕분에 미래를 여는 사람이 있다. 아주 옛날 브라질의 음악으로 나는 조금 더 행복해졌다. 살바도르에서 내가 보낸 시간 또한 이제 과거가 되었지만, 지나가도 여전히 무시할 수 없을만큼 반짝반짝 빛나는 것들이 있다. 소드레의 노래가 그렇다. A Mass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