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 때리는 그녀들>(2021)

그냥 하면 된다

작년 겨울, 처음으로 축구를 했다. 다니던 태권도장 청소년들과 탱탱볼로 치른 약식 경기였던 데다가 실력이 부족한 탓에 공 한번 제대로 몰아보지 못했지만, 우르르 공을 따라 소리치며 달렸던 이 짧은 순간에 팀 스포츠가 주는 매력과 희열을 알아버렸다. 각자가 어떤 위치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골을 넣을 수 있는지를 배우며 축구의 전략을 몸소 체감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 나는 안다. 축구를 즐긴다는 이야기는 직접 보는 것이기도 하면서, 직접 뛰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나는 더이상 날아오는 공 앞에서 움츠러드는 여자애가 아니라는 것을.

회차를 거듭할수록 뜨거운 반응이 쏟아지고 있는 SBS의 <골 때리는 그녀들>은 축구를 향한 의지를 활활 불태우게 하는 스포츠 예능이다. 이들의 간절한 목표는 하나, 팀을 우승으로 이끄는 것이다. 모델, 코미디언, 배우, 가수 등으로 각자의 분야에서 치열하게 활동하는 여성 방송인들이 오직 ‘FC ㅇㅇㅇ’의 ‘등 번호 n번 선수 ㅇㅇㅇ’으로 분해 그라운드를 누비는 치열함을 보고 있으면 직업도, 나이도, 체형도 운동을 향한 열정에는 딱히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모델로 이뤄진 ‘FC 구척장신’ 멤버들은 매거진 <W>와의 인터뷰에서 “평생 공을 싫어하는 줄만 알았던 내”가 지금은 “변화한 몸을 긍정할 수 있게 됐다”며 축구가 바꿔놓은 시선을 이야기한다. ‘축구선수 정대세의 아내’로만 불리던 명서현도 “축구선수로 사는 삶이 너무 좋아서 일본에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고백한다. 오나미는 발가락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팀이 위기에 놓이자 간절한 눈물을 흘리며 “뛰게 해달라, 할 수 있다”며 스스로 그라운드로 뛰어든다. 최여진은 드라마 촬영장에서 원피스를 차려입고도 볼을 놓지 않는다. 누구보다 뜨겁게 서로를 격려하고, 득점에는 포효하고, 실책은 감싼다. 축구공은 이들의 일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축구는 이들을 부단히 도전하게 하고, 몰입하게 만든다.

도전하려는 마음을 먹는 것은 시청자도 마찬가지다. 6개 팀이 리그전을 치르며 쌓아 올리는 서사에 감동해 열과 성을 다해 응원하는 것은 물론이고, 언젠가는 나도 해볼 수 있겠다는 긍정적인 기대를 얻는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뛰는 모습에 자극을 받고, 연이은 승부차기 끝에 얻은 값진 승리에 눈물을 흘릴 때 함께 따라 울기도 하면서 투지, 투혼, 기백, 용기, 의지, 협동, 환희, 사랑이라는 단어를 가슴에 새긴다. 과정을 즐길 마음이 있다면 그걸로도 충분하다. 겁낼 필요가 없다. 그냥 하면 된다. 이 단순한 사실을 깨닫는 데에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굽은 어깨를 펴고

2002년, 나 역시 마찬가지로 붉은악마 소속 어린이로 여름을 보냈다. 난생처음으로 저금통을 털어 국가대표 선수단의 특별 화보가 담긴 잡지를 샀고, 유럽 축구 리그 선수와 팀의 이름을 참 열심히도 외웠다. 하지만 이 열정은 청소년기를 겪으며 빠르게 식어버렸다. 직접 달리고, 넘고, 쏘고, 찌르고, 헤엄치고, 차고, 치고, 던져볼 수 있는 스포츠의 무한한 세계는 나와는 먼 것이었다. 운동장은 남학생의 차지였고, 여학생의 자리는 대부분 응원석에 고정되어 있었다.

게다가 운동신경이 부족하거나 어깨가 넓거나, 살이 쪘거나, 가슴이 크거나, 다리가 굵거나, 또래보다 키가 크거나 작은 여학생은 너무나 쉽게 놀림의 대상이 되어 왔다. 여성들에게 운동은 한동안 수치심의 영역에 굳게 갇혀 있었다. 나 역시 “어깨가 장군감”이라는 말이 듣기 싫어서 넓고 각진 어깨를 최대한 둥글게 말아 구부정한 자세로 청소년기를 보냈다. 고도로 훈련된 운동선수의 신체를 동경하면서도, 내 몸을 비난하고 부정하는 기간이 참으로도 길었다.

아마도 2000년대 후반에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이라면, 교실 귀퉁이에 놓인 벽장처럼 커다란 TV 뒤에서 누가 불쑥 들어오거나 훔쳐보지는 않을까 서로 망을 봐주며 체육복을 갈아입던 추억이 있을 것이다. 나는 강당에 가기도 전부터 구석에 수북하게 쌓인 먼지와 미묘한 불안감을 마주치는 게 싫어서 체육 시간이 싫었다. 육상을 비롯한 여러 종목에 한순간도 적응하지 못하고 우당탕 엉망진창인 내 몸도 참 싫었다. 수능을 앞두고, 시간표의 체육 시간은 모두 자습으로 전환돼 영영 멀어졌다.

그러다 수영을 만났다. 수영복을 걱정했지만 빈약한 근력이 문제일 뿐, 몸매는 단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잘하고 싶어서 퇴근 후 매일 밤 유튜브 강습 영상을 시청했다. 무엇보다도 마이클 펠프스, 박태환, 쑨 양 같은 남자 선수의 이름은 알았어도 위대한 여자 선수의 이름은 하나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서 올림픽과 세계선수권대회의 여자 수영 경기를 참 열심히 찾아봤다.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전설을 쓰고 있는 미국의 수영선수 케이티 러데키를 동경하고, 개인 혼영에서 한국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김서영 선수를 열렬히 응원 중이다.

내게 수영복은 여행 필수품이 되었고, 재작년에는 많은 수영인들의 꿈, 시드니 ‘본다이 비치(Bondi Beach)’의 ‘아이스버그(Icebergs) 수영장’을 찾기도 했다. 코로나로 수영을 못하게 된 이후로는 동네 태권도 학원에 다니며 태권도 1단을 따 사범님의 첫 성인 제자가 되었다. 언젠가는 <골 때리는 그녀들>처럼 팀 스포츠에도 도전해보고 싶다. 이처럼 근래의 나는 겹겹이 포개진 운동에 대한 편견과 작별하고, 운동의 재미와 성취를 구석구석 알아가는 중이다.

<라켓 소년단>(2021)

“A New Day, Play New”

쇼트트랙 심석희 선수가 내래이션을 맡은 나이키의 새 캠페인 <새로운 미래>는 운동하는 청소년을 화면 가득 등장 시켜 “만약에, 모든 게 바뀐다면? 우리 마음대로, 우리 방식대로”라는 질문으로 출발해, “솔직히 뭐 즐긴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니잖아”라는 청량한 확신으로 마무리된다. 지금은 2021년, 세상이 바뀌고 있고, 바뀌어야만 한다. 스포츠 역시 그렇다. ‘2020 도쿄 올림픽’에 출전해 맹활약 중인 2000년대생 선수들이 이를 증명한다. 며칠 새 너무나 멋진 선수들의 이름을 정말 많이 외쳤다. 선수들의 표정에서 부담감보다도 신난 미소가 읽힌다. 상대 팀 선수가 나이가 많든 적든 경기 분위기가 어떻든 제 몫을 척척 해내는 모습이 쿨하고 멋져 보인다. “금메달을 따지 못해 국민들께 송구스럽습니다” 같은 인터뷰는 거의 사라졌다. 이들에게 스포츠는 국위선양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내 삶의 재미와 성취를 위한 것이다.

SBS 드라마 <라켓소년단>은 이러한 분위기를 증명하듯 새로운 세대를 등장 시켜 스포츠계의 새로운 미래를 그리는 성장 드라마이면서, ‘사이다’로 점철된 요즘 세상에서 잊어버리기 쉬운 정의, 우정, 건전함, 솔직함, 믿음, 상냥함, 공동체, 연대와 같은 가치를 강조하는 드라마다. ‘착한 건 재미없다’는 편견을 산뜻하게 부수고 소년, 소녀의 영롱하고 강인한 눈빛을 동동 띄워 사랑스러운 랠리를 이어간다.

해남서중 배드민턴부의 구호는 “이겨도 같이! 져도 같이!”다. 그동안의 스포츠 드라마가 주로 운동 천재인 원톱 주인공을 내세워 시련을 극복하고 피땀 흘린 노력으로 목표를 향해 도전하는 이야기를 그려나갔다면, 이 드라마는 각 캐릭터에 생동감 있는 이야기를 불어 넣어 하나의 팀이 되어가는 과정, 1등에 가려져 주목받지 못하던 이들 역시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나아가는 모습 등을 비추면서, 그간의 엘리트 체육이 쌓아놓은 악습을 네트 뒤로 경쾌하게 넘겨버리고 건강하게 경쟁하는 법을 솔직하고 유쾌하게 보여준다.

아이들이 배드민턴을 계속하는 이유는 단 하나. ‘재미있기 때문’이다. 이 외에 별다른 이유는 필요하지 않다. 부모 때문에 배드민턴 선수의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어서” 선택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명문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 대신, 서로를 응원하며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친구들이 있는 팀을 선택할 수 있다. 상대와 실력이 차이 난다고 해서 경기를 포기할 수는 없다. 한일전은 원한이 먼저 앞서는 경기라기보다는 중요한 국가 대항전이기 때문에, 말 그대로 “민턴은 그냥 민턴이니까”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매 순간 내가 이길 거라고 굳게 믿는다. 농담처럼 가볍게 전하지만, 언제나 묵직한 진심이다. 그 믿음을 실현하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구슬땀을 흘린다.

이 모든 과정에서 성장해나가는 인물은 아이들임과 동시에 이전 세대의 체육을 겪어오며 지도자가 된 어른들이기도 하다. 매너리즘을 극복하고, 1등에만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소속 선수를 골고루 믿고, 폭력을 근절하고, 라인 위주의 정치 싸움을 없애는 데에는 어른들의 힘이 가장 필요하다. 드라마 속 어른들은 세상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차분하게 성장해 나가며 아이들에게 “져도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는 신뢰할 수 있는 어른이자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다.

‘Z세대’가 별세계 인간이라도 되는 것마냥 억지스럽고 호들갑스럽게 세대론을 꺼내지 않고, 가치관이 변화하고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여 녹여내는 것만으로도 스포츠도, 콘텐츠도 새로운 이야기를 펼칠 수 있다. 올해 여름은 이 간결한 사실을 증명해 보이는 계절이 될 것 같다.

<골 때리는 그녀들>(2021)
OTT wavve, 예능(SBS)
시놉시스
“축구! 우리도 할 수 있어!” 진정성 200%! 축구에 진심인 그녀들과 대한민국 레전드 태극전사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건강한 소모임 탄생! Goal 때리게 재밌고! Goal 때리게 쫄깃한! 여자 축구의 르네상스가 펼쳐진다.
<라켓소년단>(2021)
OTT wavve, Netflix, 드라마(SBS)
연출 조영광
극본 정보훈
출연 김상경, 오나라, 탕준상, 손상연, 최현욱, 김강훈, 이재인, 이지원, 김민기 등
시놉시스
배드민턴계의 아이돌을 꿈꾸는 라켓소년단의 소년체전 도전기이자, 땅끝마을 농촌에서 펼쳐지는 열여섯 소년소녀들의 레알 성장드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