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a, [Snowman], 2017
책과 음악만큼은 물려주겠다던 어머니의 다짐은 성공적이었다. 부모님과 함께 차를 타고 ‘The Doors’를 들으며 홍대 인근의 음악 클럽 ‘빵’에 가서 웰치스 포도 맛을 마시던 초등학생은 성인이 되어 이곳에서 맥주를 마시겠다던 당찬 포부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크론병과 살아가는 스물여섯의 나는 다시 그곳에 가더라도 웰치스를 마셔야겠지?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만큼은 조금 억울한데.

처음 그의 음악을 추천받은 건 2014년이었다. 처음의 투명함은 온데간데없는 두꺼운 실리콘 케이스를 끼워 160GB 아이팟 클래식을 들고 다니던 그때, 스마트폰을 사용하던 한 친구는 재수학원 자습실에서 시아의 ‘Chandelier’가 얼마나 좋은지 열변을 토했었다. ‘피아’의 초창기 음악에 한창 빠져 있던 나는 그 이야기를 흘려들었고, 그 후 몇 년 동안 시아에 대해 들은 건 그저 ‘엄청난 고음’으로 히트했다는 식의 이야기뿐이었다.

내가 시아에게 빠진 건 1~2년 전 ‘Chandelier’의 뮤직비디오를 처음 본 날이었다. 영상과 춤, 햇빛 없이 차갑게 부서져 가는 방의 모습도 압도적이었지만, 무엇보다도 나를 얼어붙게 한 건 그의 목소리였다. 그 유명한 ‘고음 파트’에서 느껴진 건 가창력보다도 스러지기 직전의 비참함에서 나오는 절규였다. 그 곡이 만들어진 배경을 몰랐지만, 그 노래는 너무도 매혹적으로 슬프고 절망스러웠다.

그리고 나는 그의 노래들을 찾아 듣기 시작했다. 최근의 곡들부터 시작해서 가장 처음 낸 음반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뮤직비디오를 정주행했다. 그의 가장 오래된 곡부터 가장 최신곡까지, 곡의 분위기와 무관하게 그의 노래는 대부분 슬펐다.

나는 어떤 곡을 골라야 할까 고민하며, 나를 예상치 못한 눈물로 멈춰 세운 곡들을 떠올렸다. 나는 시아의 ‘Together’, 그리고 그가 참여한 LSD의 ‘Thunderclouds’를 따라부르며 운 적이 있다. 여러 번이나. 노래도 뮤직비디오도 슬프지 않은데, 도대체 나는 왜 울었을까. 그러다 깨달았다. 문제는 ‘슬픈 노래’가 아니라, ‘견딜 수 없이 슬픈 목소리’라는 사실을.

만일 그가 단지 자신의 삶을 불행으로만 그렸다면 이토록 견딜 수 없이 슬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한 명의 만성질환자로서 다른 아픈 이들에게 닿으려고 애썼고, 한 명의 성소수자로서 차별받는 이들과 함께했다. 그의 음악에 언제나 담겨 있는 건 자신이 모두를 구할 수 없고, 자기 자신조차도 구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약함과 슬픔과 함께, 그렇기에 우리가 함께해야 한다는 의지와 사랑이었다. 바로 그 점이 그의 목소리가 ‘견딜 수 없이’ 슬픈 이유였다.

내가 고른 곡은 ‘Snowman’이다. 언뜻 크리스마스와 눈사람이라는 흔한 조합 같은 이 크리스마스 캐럴은 나를 난데없이 몇 번이고 울먹거리게 했다. 잔잔하고 따뜻한 피아노 반주에 터져 나오는 눈물을 수십 수백 번 꾹 참아내고 태연한 척하는 시아의 목소리가 포개어진다.

뮤직비디오를 보면, 시아 특유의 머리 모양을 한 사람은 그토록 쉽게 녹아버릴 눈사람과 계속 함께하기 위해 “영하(below zero)로 가서 태양으로부터 숨자”고 말한다. 그렇게 그는 눈사람들을 자기 몸만 한 아이스박스에 담아, 원래 살던 집을 떠나서 자신의 강아지와 수레를 끌며 무작정 북극으로 간다. 함께 따뜻해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추워지기 위해.

당신이 내 눈물을 닦아 줄 수 없다면, 누가 당신의 눈물을 닦아 줄까요?
뛸 다리가 없는 나를 누가 북극까지 데려가 줄까요?
당신에게 귀가 없다면 내 비밀들을 누가 들어줄까요?

그 목소리와 영상은 이 가사에 이렇게 답하는 것만 같다. 작고 약한 내가 그 눈물을 닦아 주겠다고, 당신과 함께 북극까지 가겠다고, 당신의 비밀들을 들어주겠다고, 만일 내가 할 수 없더라도 난 추운 곳에서 당신과 영원히 함께하겠다고. 그리고 그건 생각보다 즐거울 거라고.

시아의 목소리를 듣고 나면, 이제 녹아가는 눈사람을 외면할 방법은 없다. 다만 그와 함께 울고, 곁에서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 따뜻한 내 집을 두고 북극으로 함께 떠날 수밖에 없다. 견딜 수 없이 슬픈 목소리는 그토록 강하고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