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픽션 다이어리>(2014)

* 영화 <조커>의 스포일러가 많은 글입니다.

<조커>에 대해 이야기하려 들 때마다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영화에서 보여진 일련의 사건들 중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서부터가 아서 플렉(와킨 피닉스)의 망상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는 아서의 자리에 서서 아서에게 유리한 이야기만 들려준다. 세상은 그에게 친절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그를 이유 없이 학대했고, 시도때도 없이 터지는 발작적인 웃음을 오해했고… 그 모든 서술은 오로지 아서의 입장에서 이루어진다. 그것만이 아서가 저지른 많은 일들에 대한 – 매우 강력한 – 면죄부인데, 문제는 그 서술의 주인인 아서가 과대망상증 환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조커>는 아서에게 불리할 것 같은 대목들은 교묘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B호에 살던 그 여자 소피(재지 비츠)는 어떻게 됐을까. 경쾌하게 춤을 추며 상담실을 나서는 아서의 발자국마다 묻은 피의 주인은 누구일까? 아서가 더 쉽게 무력으로 제압할 수 있는 대상을 향한 잠재적 폭력은 암시만 하고 그 흔적을 감추면서, 아서를 무시하고 괴롭히던 이들을 향한 저항적 폭력은 훨씬 더 창대하게 꾸며서 보여주는 이 영화의 서술은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진실과 망상이 혼재된 이 영화 속에서 혼자 오롯이 선명한 건 아서의 인정욕구다. 월스트리트 3인방을 죽인 다음날 온 언론이 범죄에 대해 떠들자, 아서는 환희에 찬 표정으로 생각한다. 온 세상이 내가 한 일을 알아. 세상으로부터 주목을 받고 존재감을 인정받은 유일한 수단이 폭력이 되어 버리자, 아서의 삶은 거기에서부터 점점 더 아래로만 떨어진다. <머레이 쇼>에 초대되자 아서는 생방송 중 총으로 제 머리를 날려버리는 것으로 피날레를 찍을 계획을 세운다. 자신 같은 부류들을 투명인간 취급하는 세상에 대고 “내가 여기에 있다”라고 선언하기 위해 죽음을 획책하던 아서는, 방송이 제 뜻대로 안 풀리자 모두에게 자신을 무시하지 말라는 듯 계획에도 없이 자신이 월스트리트 3인방을 죽였노라 고백한다. 그것들이 진실이든 아서의 망상이든, 그것이 아서가 욕망하는 바라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는 이 뒤에 무슨 일들이 벌어질지 안다. 막대한 부를 지닌 웨인 기업은 끊임없이 고담시의 SOC 사업을 맡으며 제 자산을 불릴 것이고, 웨인 기업의 자선사업에도 고담시의 빈부격차와 치안은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아서에게 영감을 받은 광대 시위대는 부자를 향한 분노를 쏟아내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압도적인 재력을 가진 재벌 2세가 자신이 질서를 바로잡겠다며 복면을 뒤집어쓰고 저지르는 초법적인 폭력과, 조커나 리들러처럼 소외받았던 이들이 가진 자들의 질서를 무너뜨리겠다며 저지르는 위법적인 폭력의 무한나선이 반복되는 무저갱의 세계가 예정되어 있다. <조커>는 계급에 대해 이야기하는 척하지만, 영화 안엔 계급적인 분노만 존재할 뿐 그래서 그 모순을 어떤 식으로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없다. 그리고 <조커>는 그 분노로 인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데에 영화의 모든 자원을 투입한 작품이다.

영화를 보고 나오며 나는 정윤석 감독의 2013년작 다큐멘터리 <논픽션 다이어리>를 떠올렸다. 90년대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지존파 연쇄살인사건과 삼풍백화점 붕괴사건을 병치시킨 이 작품 속에서, 나는 광대 가면을 쓴 시위대 군중들과 다를 바 없는 청년들을 본다. 지존파 구성원들은 부자와 빈자를 칼 같이 나누고, 도시가 모든 자원을 빨아들여 지방에는 그 어떤 기회도 남겨놓지 않은 사태에 구체적인 분노를 느낀 이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부자들을 죽이고 자신들도 각각 10억을 모으겠다는 목표를 세웠지만, 정작 그들이 거액을 주고 산 강남백화점 VIP 고객 리스트에서 골라 죽인 이들은 대부분 빚에 허덕이는 중소기업 사장이거나 자신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가난한 하층 계급 여성이었다. (나를 비롯한 적잖은 사람들이 <조커>를 보면서 의심하는 것처럼) 사적 폭력이 계급을 역진해서 위를 향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고, 해소되지 않은 폭력은 옆이나 아래를 향해 흘러내린다. 체계적인 토대를 지닌 부는 낙수효과가 없지만, 토대가 없는 분노만 유장하게 아래로 흐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또 대책을 가장한 폭력을 저지르는 사회가 있다. 명백히 계급적인 분노에서 출발한 범죄를 분석하기 위해 <심야토론>에 모인 각계의 전문가들은, 이 모든 게 윤리교육의 부재와 공권력에 대한 무시에서 비롯됐다며 경찰력을 강화하고 삼강오륜을 더 가르쳐야 한다는 헛소리를 일삼는다. 토마스 웨인과 브루스 웨인이 대를 이어 지키려 했던 자본주의적인 ‘질서’와 안정’ 추구의 목소리가 94년 한국에서도 똑같이 반복됐던 것이다. 그렇게 지존파 연쇄살인사건의 계급적인 측면을 애써 외면한 결과, 지존파 구성원들이 사형을 선고받는 동안 비슷한 시기에 무너져내린 삼풍백화점의 책임자들은 고작 최고 7년형을 선고받고는 세상으로 나왔다. 10억을 벌기 위해 사람을 무참하게 죽인 이들은 윤리를 저버린 이들이니 사형해 마땅하지만, 수조원을 벌기 위해 붕괴 3일 전부터 급격하게 붕괴징후를 나타낸 백화점을 운영 강행한 이들의 이윤추구 동기는 자본주의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서 7년형을 받은 걸까?

우리는 배트맨이 주연인 일련의 작품들을 볼 때면 고독한 흑기사 브루스 웨인의 고뇌에 공감하고, 조커가 주연인 <조커>를 볼 때면 그의 상실과 불행을 동정한다. 하지만 <논픽션 다이어리>는 그 두 가지 모두 다 정답이 아니라고, ‘질서’와 ‘안정’으로 유지되는 자본주의적인 평화와 그에 도전하는 무정부주의적 폭력의 대립은 가짜 이항대립이라고 말한다. 이 폭력의 무한나선에서 나와서 진짜 불행의 근원이 무엇인지 직시하지 않으면, 이와 같은 불행의 순환은 결코 그치지 않을 것이다. 빌런이 끊이지 않고 등장하는 고담시가 그렇듯, 삼풍을 겪고도 다시 세월호를 겪은 우리가 그렇듯.

<논픽션 다이어리>(2014)
감독
 정윤석
주연 고병천, 김형태, 박상구
시놉시스
1994년 추석, 온 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던 사상초유의 지존파 연쇄살인이 잠잠해지기도 전,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다음해인 95년엔 삼풍 백화점이 연달아 붕괴된다. 그리고 20년 후, 죽은 자와의 서늘한 만남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