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 투게더>(1997)

“졸졸 흐르는 시냇물도 막으면 막을수록 거세게 흐른다.”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때론 장애물이 사랑을 완성하기도 한다. 냉전과 전체주의 체제의 감시가 없었더라도 줄라(요안나 쿨릭)와 빅토르(토파츠 코트) 사이의 감정이 그토록 절절하게 타올랐을까? 막상 아무것도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을 수 없는 파리에 왔을 때, 줄라와 빅토르는 서로에게 만족하지 못했다. 둘 다 서로에게 맞춰가며 살기엔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이 지나치게 거대한 사람들이니까. 각자가 지닌 비전에 상대가 따라오지 않으면 바로 질려버리는 인간들이니까. 그렇게 가만히 내버려 두면 자연스레 거품이 가라앉아 원래 수위를 드러냈을 감정들은, 장애물에 가로막히는 순간 미친 듯이 끓어오른다. 매주 빅토르의 동향을 당에 보고해야 하는 임무를 숨기고 있던 시절 줄라는 “세상 끝까지 당신과 함께할 거야”라고 고백했고, 줄라가 자신의 계획대로만 움직여 주길 강요했던 빅토르는 줄라가 자신을 떠나자 괴로움에 몸부림치다가 고국인 폴란드로 돌아가 자진해서 노동교화형을 산다. <콜드 워>는 죽을 듯 서로를 사랑하지만, 막상 곁에 있는 상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는 순간 괴로워지는 이들의 연애, 그래서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을 끊임없이 필요로 하는 파괴적인 사랑의 역사를 기록한 작품이다.

아휘(양조위)와 보영(장국영) 또한 그랬을 것이다. 그들이 싸우고 헤어진 곳이 홍콩이었다면, 그래서 바로 다시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더라면, 설령 가끔씩 나단로드나 센트럴쯤에서 불편한 심경으로 마주치곤 했을지언정 감정은 더 빨리 진화됐을 것이다. 문제는 그들이 홍콩에서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 지구의 정반대 편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돈 한 푼 없이 고립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아휘를 버리고 새 애인을 만나 화려한 유흥의 시간을 즐기던 보영은, 아휘가 탱고바 삐끼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있는 초라한 모습을 보자 곧바로 다시 사랑의 마음을 품는다. 아휘에겐 보영을 계속 사랑해야 할 이유보다 밀쳐내야 할 이유가 더 많았지만, 새 애인에게 얻어터지고 돌아온 보영을 보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보영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상대가 망가지고 병들어 자신이 그 빈 자리를 채워줘야 한다는 마음이 솟아올라야 다시 불붙는 사랑. 온갖 장애물을 만나야 비로소 이과수 폭포처럼 거세지는 마음. 아휘가 탱고바 삐끼 대신 음식점 주방에 취직하며 생활이 안정되자 마자, 보영은 아휘가 직장동료 장(장첸)과 바람을 피우고 있을 것이라 의심하기 시작한다. 보영의 다친 손이 나아 혼자서 바깥 출입을 할 수 있게 되자 아휘는 바로 보영을 향한 신뢰를 거두고 보영의 여권을 숨긴다. <해피투게더>가 그리는 사랑 또한, 상대를 차분하게 바라볼 수 있는 상황이 되면 곧바로 서로에게 질려 버리는 이들의 서글픔으로 가득하다.

사랑 없는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낳은 줄라는 폴란드에서 성공적인 가수가 되었지만 끊임없이 자신을 경멸하며 술에 젖어 살고, 빅토르는 폴란드와 파리에서 쌓아 올린 음악가로서의 모든 커리어를 노동교화형을 살면서 포기해 버렸다. 줄라와 빅토르는 서로 지닌 것들이 모두 처참하게 망가진 후에야 비로소 사랑의 언약을 맺는다. 일렬로 늘어놓은 알약들을 사이 좋게 나눠 먹고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면서. 줄라와 빅토르가 장애물들을 향해 전속력으로 돌진하는 것으로 사랑을 완성했다면, 아휘와 보영은 사랑을 그만두는 것으로 삶을 얻었다. 보영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혼자 버려졌지만, 아휘가 떠남으로써 마침내 자신도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삶(과 여권)을 얻었다. 아휘는 모든 걸 걸어도 좋을 사랑을 잃은 대신, 다시 시작해 볼 수 있는 삶과 보고 싶으면 언제든 찾아갈 수 있는 장의 주소를 얻었다. 아휘와 보영, 줄라와 빅토르 중 어느 쪽이 더 행복한 결말을 맞았는지 나로서는 장담할 수 없다. 지금보다 더 어린 시절의 나였다면 자멸하며 사랑을 완성한 줄라와 빅토르가 더 행복했으리라 생각했겠지만, 어영부영하다 30대 중반이 된 지금의 나는 어쩌면 사랑을 잃고서 삶을 되찾은 아휘와 보영이 더 행복해 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사랑이 끝나도 삶은 계속되니까.

<해피 투게더>(1997)
감독
 왕가위
주연 장국영, 양조휘, 장진
시놉시스
보영(장국영 분)과 아휘(양조위 분)는 아르헨티나에서 서로 사랑을 나눈다. 이기적인 보영의 성격 탓에 아휘는 몇 차례 이별과 재회를 반복한다. 보영에 지친 아휘에게 대만 청년 장(장진 분)이 다가와 위로를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