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 하>(2012)

까마득한 비탈길을 오르던 찬실(강말금)은, 잠시 숨 돌리려 멈춰선 자리에서 말한다. “아, 망했다. 완전히 망했네.” 방금 전까지 용달차 한 대도 못 들어올 것 같다며 투덜대던 스태프들은 화급히 답한다. “에이, 아닙니더! 비록 감독님은 돌아가셨지만, 저희들이 있으니 망하신 건 아니죠.” “네, 금방 다시 일어나실 겁니다!” 원래 자기 일이 아닐 때엔 무슨 말을 해도 참 쉽다.

같이 호흡 맞춰 일하던 감독이 회식 자리에서 돌연사하며 영화가 엎어진 탓에, 한때는 일 잘하는 프로듀서라는 칭찬을 듣던 찬실은 졸지에 일도 끊기고 돈도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무슨 일을 하냐고 묻는 주인집 할머니(윤여정)의 질문에도 변변한 대답을 못하는 상황. 그런데 ‘금방 다시 일어날’ 거라니. 그 무슨 무책임한 말인가. 물론 천성이 씩씩하고 눈 앞의 현실에 빨리 적응하는 찬실은 바쁘게 살 길을 모색한다. 친하게 지내는 배우 소피(윤승아) 집에 가사도우미로 취업하고, 소피에게 불어를 가르쳐주는 감독 지망생 영(배유람)과 썸도 탄다. 그래도 가끔은 밤잠을 설치는 날들이 있는 법이다. 다시 영화를 할 수 있을까? 나는 이 날 이 때까지 뭘 하며 살아온 걸까?

살면서 인생의 최저점을 쳐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김초희 감독의 장편 데뷔작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보며 기이한 기시감에 시달릴 것이다. 직접 경험해 보지 않고선 알기 어려운 상황들이 도처에서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믿었던 사람이 자신의 뒤통수를 치는데 하필이면 그 광경을 보여주기 싫은 사람에게 들키는 민망함.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람이 되어 비애에 젖어보려 해도 손에 들린 장바구니 속 대파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는 빨리 귀가하라고 재촉하는 웃픔. 사랑하는 상대의 마음이 내 것 같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서둘러 그 자리를 피하려는데, 하필 들고 간 도시락통이 엎어져서 달리다 말고 그걸 주섬주섬 주워담는 순간의 어색함 같은 것들.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인생의 가장 혹독한 시간조차 온전히 슬픔과 상실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눈물과 웃음은 본디 등을 맞대고 오는 법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 만든 성숙한 입춘의 이야기다. 그래서 찬실은 끝난 연애를 청산하듯 영화 관련 서적들을 죄다 싸서 버릴 채비를 하며 모질게 마음을 먹다가도, 질끈 묶은 노끈을 잘라내고 다시 책들을 책장에 꽂아 넣으며 봄을 기다린다. 눈물과 웃음이 등을 맞대고 함께 오듯, 인생의 겨울과 봄 또한 그러할 것이므로.

<프란시스 하>(2012)

스물 일곱 살의 프란시스(그레타 거윅)에게 찬실의 이야기를 들려주면 어떨까? 어쩌면 “그래도 그 사람은 프로듀서로 일하던 시절도 있었네.”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무용수로 성공해 세상을 다 정복하겠다는 거창한 꿈을 꾸지만, 프란시스의 꿈은 제대로 시동 한번 걸어본 적이 없었다. 소속된 무용단에선 한번도 연습생 처지를 벗어나 본 적이 없고, 선생 콜린(샬롯 담부아즈)은 공연에 서고 싶다는 프란시스의 말에도 늘 건성이다. 열심히 함께 연습하다가도 “언더스터디들은 퇴장해 달라”는 말 한 마디면 연습실을 비워줘야 하는 상황이다. 당장의 생계가 급해 아르바이트 자리를 잡고도, 프란시스는 끝까지 제 상황을 부정하려 애쓴다. “웨이트리스가 아니라 그냥 행사에서 기부자들한테 음료 따라주는 거예요.”

꿈도 아직 이뤄보지 못했는데, 설상가상 삶이 먼저 부스러진다. 남자친구라는 작자와는 사소한 말다툼 하나로도 사이가 끝날 만큼 차게 식었다. 입버릇처럼 ‘쌍둥이 같은 친구’라고 말하던 하우스메이트 소피(미키 섬너)는 뜬금없이 다른 친구랑 더 좋은 동네에서 살겠다며 나가버렸다. 혼자서는 뉴욕의 비싼 집세를 감당할 여력이 안 되는 프란시스는 자꾸만 떠돈다. 돈 많은 도련님들의 집에 얹혀 살고, 같은 무용단에 더 잘 나가는 동료 집에 얹혀 살고, 캘리포니아의 부모 집에 얹혀 살고… 홧김에 카드 빚을 내서 떠난 이틀 간의 파리 여행조차, 프란시스는 누구도 제대로 만나지 못한 채 떠돌기만 하다 돌아온다.

노아 바움백이 자신의 파트너 그레타 거윅과 함께 각본을 쓰고 연출한 <프란시스 하> 또한, 세상에 싹을 틔워 올리고자 발버둥치는 시기의 초조함과 불안을 가득 담은 작품이다. 스물 일곱. 지나고 보면 너무도 어린 나이인데 막상 그 나이 때엔 나이만 차고 아무 것도 못 이뤘다는 초조함이 먼저 들어차기 마련이다. 남들은 다 봄날을 맞아 발아한 거 같은데 나만 아직 흙 속에서 썩어가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함. 봄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은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는 걸 알지만, 겨울에서 벗어나 본 적 없는 사람은 봄의 존재를 믿지 못하니까.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우리도 모르는 새 봄은 온다. 전세계가 코로나19로 몸살을 앓으며 패닉에 빠지는 동안에도 어김없이 봄꽃은 피고 새순이 돋는 것처럼. “사라도 꼬처러 다시 도라오며능 어마나 조케씀미까” 찬실네 주인집 할머니가 더듬더듬 쓴 시는 아름답고 서글프다. 그러나 어쩌면 사람도 꽃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겨우내 얼어 죽지만 않는다면, 꽃들은 봄이면 끝끝내 다시 돌아와 꽃을 피워 올릴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인생의 겨울을 지나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게 있다면, 기어코 오고야 말 봄을 그리는 상상력이리라.

<프란시스 하>(2012)
감독
 노아 바움백
주연 그레타 거윅, 믹키 섬너, 그레이스 거머, 아담 드라이버
시놉시스
브루클린의 작은 아파트에서 둘도 없는 친구 소피와 살고 있는 27살 뉴요커 프란시스. 무용수로 성공해 뉴욕을 접수하겠다는 거창한 꿈을 꾸지만 현실은 몇 년째 평범한 연습생 신세일 뿐이다. 사소한 말다툼 끝에 애인과 헤어지고 믿었던 소피마저 독립을 선언하자 그녀의 일상은 꼬이기 시작한다. 직업도, 사랑도, 우정도 무엇 하나 쉽지 않은 그녀는 과연 당당하게 홀로서기에 성공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