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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몸에 생긴 혹을 떼어내는 수술을 받은 후, 나는 가급적 건강보험 급여 항목 범주 안에서 아파야 한다는 귀한 사실을 배웠다. 심상치 않은 몸 상태로 검진을 받아도 확진을 받아 질병분류코드를 획득하기 전까지는 비용을 청구할 수 없다는 걸, 같은 서류를 수차례 반복해 떼고 그 안에서 나라와 보험회사가 보장해 주는 항목과 아닌 것을 나눠야 한다는 걸 몇 년간의 서류 작업을 통해 익히게 된 것이다. 이해는 한다. 엄격하게 심사를 해야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 테니. 하지만 가끔 이리도 생생한 통증이, 거르지 않고 먹어야 하는 약들이, 내 몸이 겪는 비루함이 서류 속 코드 번호 몇 개로 환원된다 생각하면 좀 억울해진다. 그럴 때면 몇 년 전 수술한 부위가 욱신욱신 부어오른다. 질병분류코드도 없고 해서 급여 대상도 아닌, 숫자와 알파벳의 시스템 안으로 포섭되지 않는 욱신거림.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 등장하는 관공서 공무원들에게 다니엘(데이브 존스)을 괴롭혀야 한다는 선명한 악의 따위는 전혀 없었을 것이다. 한 명 두 명 사정을 봐주다 보면 원칙이 무너지고 공정한 복지 서비스를 베풀 수 없으니 최대한 공정하게 심사를 하려고 했겠지. 그러나 이렇게 제 일을 성실히 하는 이들이 모여 만든 시스템은, 개인의 비극을 개인의 책임으로 몰아세운다. 당신은 질병수당 수급대상이 아니니 실업급여를 받으라는 지침 안내 속에, 인터넷을 쓸 줄 모르는 다니엘에게 “지금은 디지털 시대다. 홈페이지에서 양식을 찾아 신청하라”고 말하는 공무원의 말 속에 시스템의 힐난이 숨어있다. 왜 시대의 진보에 뒤처졌냐고, 충분히 아프지 않으면서 수급을 받으려는 당신 같은 이들 때문에 복지 서비스의 효율이 저해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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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율과 진보. 90년대 초 보수당 정부가 경제 구조 개선을 이유로 영국의 탄광들을 폐쇄하던 시절 내세웠던 명분도 그것이었다. 여기 또 한 명의 다니엘이 있다. <브래스드 오프>(1996) 속 그림리 탄광의 브라스 밴드 지휘자 대니(피트 포슬스웨이트)는 밴드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동료와 이웃들에겐 당장 탄광의 폐쇄 앞에서 살아남는 게 더 중요하다. 희망퇴직에 서명하고 폐쇄 찬성에 투표하면 돈은 받겠지만, 그래서 파업 투쟁 때 진 빚도 갚고 이 지긋지긋한 싸움을 끝낼 수 있겠지만, 아마 폐쇄 반대 투쟁을 하는 이들 사이에서 배신자로 낙인 찍힐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서로에 대한 신뢰도, 일자리도, 식료품을 사 먹을 돈도, 투쟁할 의지마저 하나둘씩 잃어간다. 전국 밴드 경연대회 대상을 받으러 올라간 무대 위에서 대니는 수상을 거부하며 이렇게 말한다.

“전 음악이야말로 의미 있는 것이라 생각했죠. 하지만 젠장, 정말 그렇습니까? 아니죠. 사람에 비할 바 못 되죠. 2주 전 우리 밴드의 탄광이 폐쇄됐습니다. 천 명의 사람들이 직장을 잃었어요. 직장만 잃은 게 아니라 이기겠다는 의지도 오래전에 잃었습니다. 싸울 의지도 잃은 사람들도 있죠. 하지만 그게 삶의 의지를 잃고 숨 쉴 의지를 잃을 지경까지 오면 말이죠. 제 말은, 이게 물개나 고래 이야기였으면 다들 불같이 화내셨겠죠. 하지만 이 치들은 동물이 아니라 그냥 평범하고 정직하며 선량한 인간들이죠. 희망이라곤 한 줌도 안 남아있는 인간. 연주 하나는 빌어먹게 잘합니다만,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그래,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효율, 진보, 질서, 공정 같은 근사한 단어들이 사람의 생존과 존엄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면. 겨우내 촛불을 들면서 우리가 외쳤던 것도 그런 게 아닐까. 누구든 존엄과 긍지를 잃지 않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고, 생존권을 보장해 달라고 외치다가 물대포에 맞아 죽지 않는 세상, 진실을 요구해도 불순세력이라 손가락질받지 않는 세상, 시스템에 사람이 맞추는 게 아니라 사람을 위해 시스템이 봉사하는 세상, 특권계층이 아니라 한 명의 시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이들이 모두 존엄 속에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고. 다니엘과 대니가 바랐던 세상도 아마 이와 같았을 것이다. 새해에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기를.

<브래스드 오프(1996)>
Brassed Off
감독 마크 허만
출연 이완 맥그리거, 피트 포스틀스웨이트, 타라 피츠제랄드
시놉시스
1992년 북부 요크셔의 작은 탄광촌, 보수당 정부가 전격적인 폐광 정책을 준비하고 있을 때, 그 지방의 탄광 밴드는 다가오는 전국 대회를 위해 연습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엔 언제나 밴드가 있고, 특히 밴드 리더인 대니(Danny: 피트 포슬쓰웨이트 분)의 밴드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다. 대니에게 있어 음악이란 탄광이 정신을 구현해 주는 것이며 그 마을 사람들의 생명력을 대변하는 것이다. 그러나 폐광으로 인해 실업이 널리 확산됨에 따라 그의 동료들은 밴드에 대한 열정을 잃게 된다.
그러던 중 금발의 글로리아(Gloria: 타라 피츠 제랄드 분)가 탄광촌에 도착, 밴드에 가담하자 그들은 다시 활기를 찾게 된다. 사실 그녀는 그 밴드의 전설적인 지휘자였던 아더 멀린즈의 아름다운 손녀이자 밴드의 전설적인 지휘자였던 아더 멀린즈의 아름다운 손녀이자 밴드 멤버 앤디(Andy: 이완 맥그리거 분)의 어린 시절 연인으로, 밴드가 아니라 직업 때문에 10년 만에 고향을 찾은 것이다. 글로리아의 재능과 아름다움에 압도되어 순회 경연대회가 시작될 무렵 밴드에는 새로운 열정이 물결치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열기는 글로리아가 영국 광산 협회가 경제성 조사를 위해 파견한 감정사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급격히 식어버리고, 앤디와 글로리아의 관계 역시 위태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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