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롤>(2015)

<윤희에게>를 보고 돌아오던 날, 나는 오래 걸었다. 오랜 세월을 지나 비로소 만난 윤희(김희애)와 쥰(나카무라 유코)이 그랬던 것처럼. 20년 넘는 시간 동안 서로를 그리워하던 두 사람은, 감격에 찬 포옹이나 마음을 확인하는 입맞춤, 하다못해 조심스레 손을 잡는 애틋함조차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 그저 눈이 한없이 쌓인 오타루의 길을 조용히 걸을 뿐이다. 마치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벅차서 다른 일들을 할 엄두가 안 난다는 듯이. 고작 그걸 같이 할 수 있기까지 20년이 필요했으니, 그 밤의 두 사람은 아주 오래 걸음을 음미했을 것이다. 나는 두 사람의 대화를 잠시 상상하다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내가 감히 상상할 수 있는 대화가 아닐 테니까.

어떤 마음들은 입 밖으로 나온 말들보다 그 말들의 행간에 더 많은 흔적을 남긴다. 이를테면 친구는 잘 만났냐는 바텐더(이와야 켄지)의 질문에 답하는 윤희의 말처럼. 아직 쥰을 만나지 못한 윤희는, 일어나지 않은 소망들을 마치 있었던 일처럼 답한다. “모처럼 만나서, 같이 맛있는 것도 먹고 산책도 하고 집에 놀러도 가보고 그랬어요.” 혹여 누가 들을까 한국어로 조용히 말하는 그 소망의 리스트는, 그런 것치고도 너무 소박하다. 맛있는 것도 먹고 산책도 하고 집에 놀러 가는 것 말고 정말로 하고 싶은 일들이 많을 텐데. 아무도 알아듣지 못할 말로 아무도 진위를 확인할 수 없는 말을 늘어놓는 순간조차, 윤희는 말보다는 말과 말 사이의 허공에 더 많은 마음을 걸어 놓는다.

비슷한 대화를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캐롤>에서였다. 테레즈(루니 마라)는 자신을 두고 훌쩍 떠난 캐롤(케이트 블란쳇)의 행동이 당혹스럽다. 자신과의 밀회를 녹음한 테이프가 양육권 소송 과정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을 걱정해 떠난 걸 알면서도, 마치 자신을 짐처럼 내버려두고 간 캐롤의 행동이 낯설고 서럽다. 옛 애인 애비(사라 폴슨)를 시켜 자신을 챙겨 돌려 보내줄 것을 부탁한 것만 봐도 그렇다. 혼자서는 집에 돌아가지 못할 사람처럼 보인 걸까. 두고 온 짐을 좀 챙겨오라고 부탁하듯 사람을 보낸 이유는 뭘까.

테레즈는 괜히 분한 마음에 애비를 향해 묻는다. “캐롤하고는 어떤 관계예요?” 애비는 담배를 태워 물고 답한다. “당신이랑은 전혀 달라요. 열 살 때부터 캐롤과 알고 지냈죠. 5년 전 여름이었나, 밤늦게 엄마 집 근처에서 내 포드가 망가졌어요. 밤을 새우려던 게 내가 예전에 쓰던 트윈베드에서 같이 안고 자게 됐어요. 한동안은 그게 전부였어요. 그러다 변했죠. 변한 거예요.” 나는 ‘변했죠, 변한 거예요.’라는 말 앞에서 오랫동안 서성였다. 저 행간의 말들은 무엇이었을까. 캐롤도 애비도 모두 공히 예전에 끝났다고 말한 두 사람의 서사에서 생략된 부분이 무엇이었을까 한참 생각하다가, 그 또한 이내 생각을 접었다. 내가 알 수 있는 일들이 아니리라.

어떤 연애담은 다른 여느 연애담보다 더 아프고 모질다. 그 연애는 잘못된 것이라고 세상이 부당하게 비난하는 연애일수록 더더욱 그렇다. 1952년 미국 정신의학회가 발간한 『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편람』은 동성애를 사회병질적 인격장애로 못 박았다. 캐롤은 양육권을 지키기 위해 심리상담사를 만나 동성애를 ‘치료’받는 과정을 거친다. 자신이 딸아이를 키우기에 ‘윤리적으로 문제없는’ 사람임을 증명하기 위해서다. 50여 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뒤지만, 한국의 윤희 또한 쥰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정신병원에 보내졌다. 미국 정신의학회가 1974년 『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편람』 개정판의 병명 목록에서 동성애를 삭제했지만, 여전히 전세계 수많은 동성애자들이 ‘전환치료’라는 허울 좋은 핑계로 학대당하고 자기부정을 강요당한다. 어떤 연애담은 다른 여느 연애담보다 더 아프고 모질다.

<윤희에게>를 끝까지 다 봐도 윤희와 쥰이 서로 사랑하던 시절이 어땠는지 알 수 없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마치 <캐롤>에서 캐롤과 애비가 함께 했던 시절이 그 짧은 문장들 사이에 빼곡하게 담겨있던 것처럼. 그러니 우리는 윤희와 쥰, 캐롤과 테레즈의 행복을 빌어주면서도 한편으론 남겨진 이들의 이야기를 궁금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애비는, 료코(타키우치 쿠미)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이 미처 다 말하지 못하고 허공에 걸어둔 마음들은 또 어떤 모양일까. 이 부당하게 아프고 모진 세상에.

<캐롤>(2015)
감독
 토드 헤인즈
주연 케이트 블란쳇, 루니 마라
시놉시스
1950년대 뉴욕, 맨해튼 백화점 점원인 테레즈(루니 마라)와 손님으로 찾아온 캐롤(케이트 블란쳇)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거부할 수 없는 강한 끌림을 느낀다. 하나뿐인 딸을 두고 이혼 소송 중인 캐롤과 헌신적인 남자친구가 있지만 확신이 없던 테레즈, 각자의 상황을 잊을 만큼 통제할 수 없이 서로에게 빠져드는 감정의 혼란 속에서 둘은 확신하게 된다. 인생의 마지막에, 그리고 처음으로 찾아온 진짜 사랑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