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든 싫든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는 두 사람의 왈츠
모든 이혼한 부부가 그런 건 아니겠으나, 어떤 이혼한 부부들은 다소 기괴한 적대적 동지관계에 평생 얽혀 살게 된다. 이혼이 성립하기까지의 과정 또한 모두 결혼의 테두리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고, 두 사람이 함께 책임져야 할 가족이라도 있을 때엔 결혼은 끝나고도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 이혼한 후에도 양육이라는 공동의 목표가 있고, 이혼했다고 해서 명확하게 나눌 수 없는 공동명의의 재산이나 공동의 이해관계, 공동의 친척이 있으며, 무엇보다 불행했던 결혼 기간부터 고통스러운 이혼에 이르기까지 헤어지는 과정 속에서 서로가 어떤 마음의 지옥을 헤치고 왔는지 온전히 이해해 줄 수 있는 지구 상 유이한 사람들이니까. 좋든 싫든, 두 사람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는 건 결국 서로인 셈이다.
노아 바움벡의 영화 <결혼 이야기>(2019)에서 많은 이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하는 명장면은 찰리(애덤 드라이버)가 급하게 LA에 구한 집에서 찰리와 니콜(스칼렛 요한슨)가 격렬한 언쟁을 벌이는 장면이나, 니콜이 쓴 찰리의 장점 목록을 찰리가 뒤늦게 읽고 눈물을 훔치는 장면처럼 정서적으로 폭발적인 순간들이다. 그러나 난 내내 다른 장면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혼의 모든 절차가 마무리된 이후, 연기가 아닌 연출로 에미상 후보에 오른 니콜이 웃으며 찰리에게 “이제 당신이 왜 그렇게 (연출에) 집착했는지 알겠어.”라고 말하는 그 장면 말이다. 니콜이 얼마나 연출가로 데뷔하고 싶어 했는지, 찰리가 극단의 연출가 자리를 놓지 않고 붙들고 있는 동안 니콜이 얼마나 갑갑해 했는지는, 역설적으로 찰리가 제일 잘 안다. 그리고 이제 니콜 또한 찰리가 왜 그 자리를 붙들고 놓지 않으려 했는지 이해한다. 더는 함께 살 수 없는 두 사람이지만, 여전히 두 사람은 서로를 세상에서 가장 깊이 이해하는 사람들이다.
그 장면을 보며 난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1979) 속 한 장면을 생각했다. 테드(더스틴 호프만)가 고용한 변호사 쇼네시(하워드 더프)는 조애나(메릴 스트립)가 주 양육자가 되기엔 정서적으로 불안정하고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할 능력이 안 되는 사람이라 몰아세우기 위해 조애나에게 “두 사람의 결혼을 유지하는 데 실패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조애나는 한사코 차분하게 ‘실패한 것은 내가 아니라 우리의 결혼 생활’이라고 답하려 하지만, 쇼네시는 계속 실패한 것은 결혼이 아니라 당신이라고, 그렇지 않냐고 거세게 조애나를 압박한다. 증인석에서 눈물이 고인 채로 시선을 돌리던 조애나는, 피고석에 앉아있던 테드와 눈이 마주친다. 함께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테드는, 입모양으로 조애나에게 “아니야”라고 말한다. 우리의 결혼이 엉망이 되어 실패했을 뿐, 당신이 실패한 게 아니라고. 그 찰나의 순간에 이 영화의 가장 서글픈 깨달음이 반짝 빛난다. 서로를 주 양육자가 되기에 부적격한 사람이라 몰아세우는 순간조차도, 내 마음 온전히 알아줄 상대가 바로 양육권 소송 중인 서로라는 기이한 서러움이.
물론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와 <결혼 이야기>를 등가비교하는 건 <결혼 이야기>에 실례되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는 분량으로 보나 정서로 보나 남자 쪽에 훨씬 더 감정이입을 하는 작품인 반면, <결혼 이야기>는 분량과 정서를 절반씩 착실하게 나눠 가져간 작품이니까. 애덤 드라이버는 더스틴 호프만처럼 촬영 중에 무례하게 굴지도 않았고, 그래서 <결혼 이야기>에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를 다시 볼 때 느끼는 찜찜함 같은 게 없다. 여러모로 <결혼 이야기>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보다 한층 진일보한 사려 깊은 영화다. 그럼에도 두 영화는 ‘이혼에 따라 누가 어린 아들의 양육권을 가져갈 것인지를 두고 싸우는 젊은 부부의 이야기’라는 스토리상의 등뼈를 공유하고, 이혼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들은 결국 서로라는 서글픈 페이소스로 공명한다.
두 영화를 연달아 본 어느 저녁, 나는 내가 아는 몇몇 사람들을 조용히 떠올려 보았다. 이혼한 뒤에도 자식들 걱정을 나누다가 어느새 은근슬쩍 재결합한 친구의 가족이나, 함께 하던 사업을 정리하지 못해 남남이 된 후에도 여전히 전 남편과 동업자 관계로 남은 친구, 그리고 이혼 후에도 20여 년을 차로 10분 거리에 살면서 서로의 삶에 크고 작은 개입을 반복했던 나의 부모까지. 자라는 동안 나는 부모님의 그런 면모들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젠 조금은 그들을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에게 이 영화들을 보여주고 싶다. 물론 보수적인 나의 부모는 이 영화를 보고도 영화가 개운한 해피엔딩이 아니라고 툴툴댈 것 같지만.
감독 로버트 벤튼
주연 더스틴 호프만, 메릴 스트립
시놉시스
광고 회사에 다니는 남편 테드(더스틴 호프만 분)와 일곱살난 아들 빌리(저스틴 헨리 분)를 뒷바라지하며 살던 조안나(메릴 스트립 분)는 어느날 새 인생을 찾겠다고 부자를 남겨둔 채 집을 나간다. 가정일이라곤 해 본적도 없는 테드는 직장 다니랴, 살림하랴, 애키우랴, 정신이 하나도 없지만 최선을 다한다. 그렇게 18개월이 지난 어느날 테드와 빌리가 나름대로 적응하며 잘 지내고 있을때 조안나는 빌리를 데려가겠다고 양육권 소송을 제기한다. 분노한 테드는 변호사를 선임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지만, 그동안 빌리를 키우느라 회사 생활이 소홀해 진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회사측에 의해 해고를 당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