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세일즈맨>과 <시>의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에마드(샤하브 호세이니)는 영화 내내 단죄를 위해 뛰어 다닌다. 겉보기에 그의 여정은 아내 라나(타라네흐 알리두스티)를 습격한 괴한을 찾아 정의를 세우고 라나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에마드의 속내는 조금 더 복잡하다. 에마드의 신경을 긁는 건 실추된 명예다. 알고 보니 전에 살던 세입자는 문란한 여성이었고, 범인은 아마 그 여자를 찾아오던 남자들 중 하나였을 것인데, 하필이면 라나는 초인종을 누른 이가 에마드인 줄 알고 문을 열어주고는 샤워를 하다 변을 당했다. 교육자이자 예술인인 지식인 계급 부부 라나와 에마드의 명예 위에는 사적인 공간을 침해당했다는 모욕감뿐 아니라 결국 저 치들도 그렇고 그런 사람들 아닌가 하는 주변의 오해가 흩뿌려졌다. 라나가 경찰에 신고하는 걸 원치 않는다며 침묵을 선택하고, 불안하니 곁에 있어 줄 것을 부탁해도 에마드는 멈추지 않는다. 사건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닌 이가, 사건의 직접적인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서 수행하는 추적과 단죄. 그러니까 에마드는 불가능한 단죄를 위해 몸부림 치는 셈이다.

불가능한 단죄를 위해 뛰어다니는 사람의 맞은 편에, 불가능한 속죄를 위해 묵묵히 걷는 사람도 있다. <시>의 주인공 미자(윤정희)가 그렇다. 이혼한 딸이 맡기고 간 중학생 손자 욱이(이다윗)를 홀로 키우는 미자에게 삶은 쉽지 않다. 생활보호대상자인 미자에게 사는 건 늘 어려운 일이고, 노인 환자 간병도우미 일로 간신히 유지하는 형편을 아는지 모르는지 손자는 휴대폰이나 새 것으로 바꿔 달라 투정한다. 그런 조건 속에서도 미자는 피처럼 붉은 동백꽃을 보면 입을 환히 벌리며 기뻐하고, 지상으로 낙하하는 살구의 속살을 보며 감탄할 줄 안다. 미자는 늦게라도 자신이 느끼는 삶의 아름다움을 기록하는 법을 배우려 지역문화센터의 시 쓰기 강좌를 등록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명사부터 잊기 시작하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은 와중에, 덜컥 손자가 저지른 죄가 미자의 앞에 고깃덩이처럼 툭하고 떨어진다. 명백한 죄 앞에서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것은 점점 요원해지는데, 미자를 제외한 그 누구도 진지하게 속죄를 하려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일을 어떻게 무마할 것인지 논하고, 합의금 액수를 어떻게 할지 논한다. 깊은 밤 우두커니 앉아있던 미자는 갑갑한 마음에 손자의 방에 들어가 자던 손자를 붙잡고 묻는다. “일어나, 왜 그랬어! 왜 그랬어!” 손자는 속죄 대신 이불을 뒤집어 쓰고 침묵하는 쪽을 택한다. 모두가 죄를 피하려 도망칠 때, 미자는 자신이 저지른 것이 아닌 잘못을 대신 속죄하는 불가능한 일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정반대 편에 서 있던 에마드와 미자는, 현실의 부조리 앞에서 예술의 윤리를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의 문제 앞에서 마주친다. 에마드는 기껏 잡은 범인(파리드 사자디 호세이니)의 정체 앞에서 복수를 망설인다. 자신이 연극무대 위에서 연기해야 하는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 속 세일즈맨 윌리와, 눈 앞에 서 있는 노인의 처지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를 경멸하고 증오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의 가족들 앞에서 그가 저지른 일을 폭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세일즈맨 윌리의 초라하고도 비극적인 삶을 이해하고 연기하던 에마드에게, 눈 앞의 세일즈맨을 그것도 라나가 원치 않는 방식으로 단죄할 자격이 있을까? 그런 후에도 에마드에게 세일즈맨 윌리의 삶을 재현할 자격이 있을까? 에마드가 번뇌하는 동안, 미자는 시를 통해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이 불가능한 현실 앞에서 직접 윤리적 결단을 내린다. 모든 일이 무마되었다고 사람들이 안도하던 순간, 시적 도약을 통해 자신에겐 할 자격이 없던 속죄를 대리한 것이다. 두 영화의 말미, 에마드와 라나는 무대 위에 오르기 전 윌리와 린다가 되기 위해 분장을 받으며 거울을 들여다본다. 미자는 손자가 서 있어야 할 자리에 대신 서 있는 경관(김종구)과 함께 말 없이 셔틀콕을 주고 받는다. 연극도 아니고 시도 아닌 그 순간들이야말로, 세 사람의 삶에서 가장 예술의 윤리가 반짝이는 순간들이다.

<시(2010)>
감독 이창동
출연 윤정희
시놉시스
한강을 끼고 있는 경기도의 어느 작은 도시, 낡은 서민 아파트에서 중학교에 다니는 손자와 함께 살아가는 미자. 그녀는 꽃 장식 모자부터 화사한 의상까지 치장하는 것을 좋아하고 호기심도 많은 엉뚱한 캐릭터다.
미자는 어느 날 동네 문화원에서 우연히 ‘시’ 강좌를 수강하게 되며 난생 처음으로 시를 쓰게 된다. 시상을 찾기 위해 그 동안 무심히 지나쳤던 일상을 주시하며 아름다움을 찾으려 하는 미자. 지금까지 봐왔던 모든 것들이 마치 처음 보는 것 같아 소녀처럼 설레 인다. 그러나, 그녀에게 예기치 못한 사건이 찾아오면서 세상이 자신의 생각처럼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