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세 딸들>(2024)

침묵에 가깝도록 음악이 배제된 영화를 마주하게 되면 무척이나 설렌다. 영화의 시작을 알리며 서사 안으로 즉시 빠져들도록 유도하는 적재적소의 사운드트랙에 매료될 때도 있지만, 장치 하나 없이 현실과 비견한 장면을 묵묵하게 그려내는 걸 볼 때 나는 더없이 몰입하게 된다. 언제 벽에 걸어놓았는지 모를 오래된 액자나 매일 야구 경기를 보며 앉아 있었을 법한 사용감이 짙은 일인용 소파, 이제는 더 이상 이곳에 머물지 않는 독립한 자녀들이 어릴 때 쓰던 잡동사니들이 공간 곳곳을 변함없이 지키고 있는 그런 소소한 풍경. 슬리퍼를 질질 끌며 생기는 마찰음이나 도마 위에 올려둔 채소를 칼로 썰 때 나는 소리만이 간헐적으로 들리다가 말고, 또 들리다가 잠잠해진다.

일상에서의 소리는 보통 그런 식으로 등장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헤드셋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한강 대교를 건널 때의 느낌과는 사뭇 다르다. 늘 뛰는 트랙 위나, 변칙 없이 가장 효율적인 경로로 움직이게 되는 통근길에서조차 음악은 이전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어떤 음악을 선곡하느냐에 따라 매일 가던 길의 모습이 다르게 느껴지고, 불과 며칠 사이로 계절감이 달라진 것을 문득 더욱 선명하게 체감하게 되기도 한다. 그건 분명 영화적인 감각 같다. 프레임 안으로 순간 들어와 버린 것 같은 환상적인 기분. 그러나 그렇기에 어떤 영화는 좀처럼 ‘영화적으로’ 느껴지지 않기도 한다. 낭만과 환상 같은 건 영화 속에서나 있는 것이고, 실제 삶은 그렇게 진행되지 않는다는 걸 부러 강조하기라도 하는 듯한. 조화로운 멜로디에 자칫 보이지 않고 가려지는 모서리나 틈이 있지는 않을지, 관객에게 숨죽여 지켜보라는 듯 의도적으로 고요함을 택하는 영화.

<아버지의 세 딸들>은 그런 점에서 연극적인 연출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뉴욕의 오래된 협동조합 아파트를 배경으로 아버지의 임종을 함께 하기 위해 모인 세 자매는 좁고 긴 복도에 면한 거실과 부엌, 그리고 병실로 쓰이는 아버지의 방을 비롯해 각자의 동선을 넘나들며 얼마간 같이 지내야 한다. 병세가 심각해지기 전부터 간병을 해오며 아버지와 함께 지낸 레이첼은 한시적으로 머물게 된 자매, 특히 언니인 케이티에게 그간의 집안 살림에 관해 속속들이 검사를 받는다. 오직 썩어 문드러진 사과만이 몇 꾸러미씩이나 쌓여 있는 냉장고, 환자가 있는 집임에도 불구하고 종일 마리화나 냄새가 나는 것이 케이티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말이 간병이지 실제로는 레이첼이 기생충처럼 아버지의 집을 원하는 것일 뿐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레이첼은 변변한 직업도 없이 스포츠 경기 내기나 하며 골초로 살고 있으니까. 다소 강박적으로 보일 만큼 매사 깐깐한 케이티에게 레이첼을 대면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저러다가 나중에 앞가림도 못하는 레이첼을 가족이라는 이유로 책임져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먼저 앞선다.

<아버지의 세 딸들>(2024)

뉴욕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서부에 사는 크리스티나와는 달리, 케이티는 브루클린에 살고 있으면서도 아버지를 찾아오는 일이 드물었다. 사춘기에 접어든 자녀의 반항적인 태도에 지쳐 있던 케이티는 자신의 문제를 처리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레이첼에게 아버지의 간병을 전적으로 맡긴 셈이었다. 그간의 부채감 때문인지 케이티는 맏언니로서 해야 할 일에 집착한다. 동생들의 저녁을 만들고, 호스피스 직원들에게 아버지의 상태에 관해 묻고, 심폐 소생 거부 동의서를 처리하기 위해 병원에 전화를 걸고, 아버지의 부고를 쓰기 위해 매일 밤 골몰한다. 그러면서도 아버지의 의식이 멀쩡할 때 동의서에 사인을 받지 못한 레이첼의 게으름에 짜증이 난다.

레이첼은 두 자매와 어머니가 다르다. 그러나 세 자매는 이른 나이에 각자의 어머니를 떠나보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아버지가 죽고 나면 세 자매는 어쩌면 가족이라는 테두리로 더는 묶이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적어도 레이첼과 케이티 두 사람은. 과거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영화는 자세히 말해주지 않지만, 두 사람은 5분 이상 대화를 이어 나가지 못한다. 한 공간에 오래 있게 되면 종내에는 한 번쯤 큰 소리가 날 수밖에 없는 관계. 그러나 아파트 안에 있는 그 누구도 음악을 크게 듣거나 함성을 내며 경기를 볼 수 없다. 삐- 삐- 삐- 환자감시장치에서 나는 일정하고도 반복적인 소리로만 아버지의 생사를 확인할 수 있으니까. 지루하도록 반복적인 그 한 음만으로 죽음이 다가왔음을 알아채야 한다는 것이 제법 허탈하게 느껴질 만큼.

영화는 시종 고요하고 건조하게 세 자매의 간병하는 일상을 내비친다. 영화가 시작되고 난 뒤 15분쯤이 흘러서야 자매들이 머무는 공간을 환기하듯 재즈 피아노 선율이 짧게 등장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음악이 흐르지 않는다. 깊은 오해로 꾹꾹 눌러 담은 감정을 내뱉는 자매들의 대사, 더 듣지 않기 위하여 혹은 더 말하지 않기 위하여 애써 서로를 피하고자 방 안으로, 집 밖으로 나가고 들어오는 문소리, 매일 아침 아버지의 죽음을 확인하러 오는 호스피스 직원과의 대화만이 비좁은 아파트에 머물다가 사라지길 반복한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애도를 준비하기엔 역부족이기만 한 공간에서 자매들은 죽어가는 아버지를 한쪽 방에 밀어둔 채 오래전 해야 했을 이야기들을 비로소 나누기 시작한다.

크리스티나는 어머니가 죽은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아버지가 TV를 보다 말고 격분했던 이야기를 꺼낸다. 영화에서의 죽음과 실제 죽음은 큰 괴리가 있다고. 죽음을 이미지나 언어로 옮기려는 행위 자체가 잘못된 거라고. 죽음은 부재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 한 사람의 삶을 요약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사람의 삶 전체를 파악해야만 알 수 있는 것. 이 영화가 음악을 최대한 배제하려는 까닭을 나는 여기서 찾았던 것 같다. 죽음을 말하고자 하는 모든 예술적 시도가 가끔은 면구스럽고 자주 헛헛해지는 까닭 또한. 죽음은 그다지 환상적이지도 낭만적이지도 않으니까. 그럼에도 영화 말미에는 환상에 가까운 모놀로그가 등장한다. 환상은 현실이 아니기에 생겨나는 법. 자매들은 아버지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아버지는 무슨 말을 남기고 싶었던 걸까. 그러니까 삐소리가 잦아들기 전에.

 <아버지의 세 딸들>(2024)
원제 His Three Daughters
OTT 넷플릭스(NETFLIX)
출연 나타샤 리온, 엘리자베스 올슨, 캐리 쿤
시놉시스
병든 아버지의 마지막 나날을 함께하기 위해 뉴욕의 비좁은 아파트에 모인 세 자매. 서로 소원하게 지내던 세 사람 사이에 격렬한 감정이 소용돌이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