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이라는 세계, 아바타라는 육체
게임 속 지도 밖 모니터 앞
그가 물었다. 게임 맵의 끝에 가본 적 있냐고. 금세 상상에 빠졌다. 투명하거나 반투명한 막힌 벽, 아무리 키보드 방향키를 눌러 발버둥쳐도 넘어갈 수 없는 세계의 끝. 모서리를 둘러싸고 갑자기 납작한 평면이 펼쳐지거나, 저 멀리 바라볼 수밖에 없는 광대한 풍경이 등장하는 막다른 지점. 어찌할 수 없는 막막한 기운이 스멀스멀 깃들 찰나, 그가 이어 말했다. 당신과의 만남은 게임 맵을 확장해 나가는 과정 같다고. 예전엔 이렇게 가까이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골목을 나란히 걸으니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순간 나, 아니 우리 앞에 펼쳐진 땅 위로 드리워져 있던 어두운 회색빛 그림자가 걷혔다. 마치 시야가 총천연색으로 바뀌는 것만 같았다. 같이 걷고, 뛰고, 날아서 밟을 수 있는 땅이 눈앞에 새로이 생겨났다.
그제야 게임도 퍽 로맨틱한 것일 수 있겠구나 깨달았다. 주위 몇몇이 매일 밤 음성이나 화상 채팅을 켜놓고 게임에 몰입하는 이유도 이해하게 됐다. 발 딛고 선 곳이 현실인지 가상인지는 중요치 않다. 함께 모험하고 함께 성장하며 경험의 영토와 앎의 지도를 확장하는 일이 낭만적임은 변치 않기에.
비로소 현실의 나와 가상의 나가 역전되는 현상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믿게 됐다. 치열한 싸움, 뜨거운 포옹, 미적지근한 헤어짐, 익명의 스침……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어정쩡한 단어로 쉽게 퉁쳐 부르는 일이 바깥세상보다 스크린 속 세상에서 빈번하게 일어난다면, 전자기기를 타고 접속한 세상에 더 오래 머무르게 된다면, 아는 아바타와 새로운 아바타를 거의 매일 만난다면, 본연의 나는 당연히 그곳에 더 오래 남아 머물 수밖에.
“여정의 끝에 다다랐습니다”
25세 젊은 나이로 점차 근육이 소실되어 온몸이 굳어가는 유전 질환 ‘뒤셴형 근이영양증’을 앓다 떠난 청년 마츠 스테인. 홈 비디오에 담긴 그의 모습은 쓸쓸해 보인다. 그는 활기차게 움직이는 가족과 친구들 사이로 얇고 굽은 몸으로 휠체어에 앉아 있다. 가뿐히 먹고 마실 수도 공을 찰 수도 없다. 증세가 심해질수록 키보드 버튼을 누르는 일조차 버거워져만 간다. 그런데 그가 세상을 떠난 2014년, 가족이 그의 죽음을 인터넷 세상에 알리자마자 유럽 각지에서 마츠를 추모하는 메일이 쏟아진다. 홈 비디오가 리와인드 되면 가족들은 전혀 알 수 없었던 마츠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다큐멘터리 영화 <이벨린의 비범한 삶>은 죽기 전 마츠가 10년 동안 2만 시간을 쏟아부은 이면이면서 전면인 삶, 게임 아바타 ‘이벨린’으로 살아온 삶을 애니메이션으로 재구성해 선보인다. 마츠가 남긴 블로그 ‘인생 사색’의 글과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WoW)’의 길드 ‘스타라이트’의 롤플레잉 캐릭터 소개, 대화, 커뮤니티 토론 내용을 담은 4만 2천 페이지에 달하는 포럼 아카이브를 기반으로 마츠의 목소리를 닮은 배우가 내레이션을 더했고, 전문 배우들이 장발, 콧수염, 짙은 눈썹, 파란색 눈동자, 커다란 근육질 몸으로 서로를 연결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탐정 ‘이벨린 레드무어’와 주변 캐릭터를 연기했다.
이벨린은 진취적이다. 그의 조언이 게임 밖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해결한다. 사람들은 이벨린에게 기대고 마음을 터놓는다. 현실에서는 어려운 포옹도 키스도 게임에서라면 가볍게 해낼 수 있다. 마츠는 말한다. “다행히 전 저만의 탈출구를 찾았죠. 단순한 스크린이 아니에요. 제 마음이 원하는 곳으로 가는 하나의 관문이죠. 컴퓨터를 켜고 음악을 크게 틀어요. 그러면 전 다른 세상으로 가요. 대부분 ‘아제로스’라는 작은 세상에서 시간을 보내죠. 그곳에선 절 옭아맨 사슬에서 풀려나요.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될 수 있고요” 마츠의 몸이 옴짝달싹 못 하는 감옥에 가까워질수록 감정을 드러내는 일 역시 불가능해지지만, 게임 속 이벨린은 첫사랑에 빠지고, 바람을 피우며, 이간질로 갈등을 빚기도 한다.
게임 이외의 생활이 불가능했던 그는 아제로스에서 인간성을 배운다. 무엇보다 진심을 터놓는 법을 깨친다. 그렇게 노르웨이 한 가정에서 시작된 우정의 씨앗이 거침없이 촘촘한 그물망을 타고 뻗어나간다. 장애는 더 이상 장애가 되지 않는다.
언제든 접속 가능한 안식처
2020년, 1999년 출시된 클래식 RPG 게임 ‘일랜시아’가 20주년을 맞은 해.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 <내언니전지현과 나>가 개봉했다. 운영진은 사라진 지 오래인 데다 업데이트도 되지 않아 ‘망겜’이라 불리지만, 매크로 없이 플레이하기 쉽지 않고 해킹과 버그가 난무하지만, BGM을 틀면 바로 게임이 꺼질 정도로 낮은 사양 탓에 떠난 이가 셀 수 없이 많지만 “살아남은 몇몇 소수 고대인의 마지막 희망의 땅” 판타지 월드 일랜시아에서는 “누구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높은 자유도에 매료된 유저들이 오늘도 여전히 관계 맺고 있다.
‘내언니전지현’이라는 닉네임으로 16년 넘게 일랜시아를 플레이 중인 유저이자, ‘마님은돌쇠만쌀줘’라는 길드의 마스터 박윤진 감독은 카메라를 들고 온라인, 오프라인 경계 없이 분주히 돌아다닌다. 그리고는 직접 유저들을 만나 묻는다. “일랜시아 왜 하세요?” 영화 후반, 게임을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 중인 감독이 스스로 카메라를 보고 응답한다. “이 안에 있는 캐릭터들은 다 사람이거든. 그런 면에서 나는 절대 가상 공간이 아니라고 생각해. 내가 아플 때 ‘내언니전지현’ 캐릭터를 병원에 넣어놔, 그럼 좀 낫는 거 같애”
이 다큐멘터리에도 누군가에게는 이미 추억이 됐지만 누군가에게는 현재진행형인 게임 커뮤니티를 지키고 기억하려는 사람들의 기록이 담겨 있다. 아바타들끼리 단체로 모여 기념 스크린샷을 찍고, 길드원 MT에서 철 지난 케이팝을 부르며 세계를 넘나들며 어울린다. 만남과 헤어짐이 수없이 반복되어도 남은 이들은 앞으로도 그리할 것이다. 서버가 종료되지 않는 한. 스타라이트 길드원들이 이벨린을 추모하기 위해 매년 게임 속 묘지 앞으로 모이듯.
죽음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을 무렵, 마츠는 토로한다. “게임은 제 안식처예요. 여기 있으면 안전하고 가치가 있으며 존중받는 기분이죠. 그런 안식처가 위협받는 걸까요? 더는 게임을 할 수 없게 될까요?” 어떤 이들은 게임하는 시간이 무의미하다고 손가락질한다. 또 어떤 이들은 가상 공간에 몰입한 인간을 현실 도피자에 불과하다고 얕잡아본다. 그렇지만 게임 하나로 연결되어 세상을 바꾸려는, 안팎을 잊지 않으려는 이들이 있다. 마츠 ‘이벨린’ 스테인과 모험했던 사람들이자 아바타들은 그를 우정과 사랑의 이름으로 기억한다. “이벨린은 든든한 버팀목이었죠. 제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였으니까요”
원제 The Remarkable Life of Ibelin
OTT 넷플릭스(NETFLIX)
출연 벤자민 리
시놉시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즐기던 한 젊은 게이머.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온라인 친구들이 유가족에게 메시지를 전하면서 그의 비밀스러운 생애가 생생하게 되살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