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렛미인>(2008)

나는 초중고 12년을 어떻게 살아남았더라. <소년시절의 너>(2019)를 보고 한참을 생각해봤지만, 유년시절의 기억은 어쩐지 김 서린 유리창 너머로 보는 풍경처럼 흐릿하다. 물론 단편적인 기억들은 난다. 어떤 해에는 부모님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쟤는 엄마아빠가 버리고 가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키우는 거래” 같은 헛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는 여자애들과 한 반이었고, 어떤 해에는 책만 들여다보고 운동을 잘 못한다는 이유로 같은 반 남자애들로부터 짐짝 취급을 받았다. 해마다 따돌림을 당하는 이유도 조금씩 달랐다. 좋아하는 가수가 달라서, 말투가 애 어른 같아서, 누나가 장애인이어서, 특정 과목에 대한 애정 표현이 유난스러워서, 브랜드 가방을 매지 않아서… 참 별 거 아닌데, 그 나이대의 아이들에겐 그 별 거 아닌 일로 지옥을 만들어내는 초능력이 있다.

12년 내내 따돌림과 괴롭힘의 대상이었던 건 아니었으나, 먹잇감을 피해간 해의 기억이라고 해서 별로 즐겁진 않다. 용케 친구를 만들어 따돌림을 면했던 어떤 해에는 다른 애를 향한 따돌림을 묵인하거나 때론 소극적으로 동참하기도 했다. 자신이 괴롭힘을 당할까 두려워 첸니엔(주동우)을 향한 괴롭힘에 동참했던 샤오먀오(장흠이)처럼. 학급 내 왕따의 총량은 정해져 있고, 누군가 따돌림을 당하지 않으면 그 화살이 다시 내게 꽂힐 거라 생각했으므로. 나는 사회로 나온 뒤엔 학교에서의 시간은 좀처럼 돌아보지 않았다. 따돌림을 당했던 기억, 묵인했던 기억, 동참했던 기억은 모두 하나 같이 부끄럽고 끔찍해서, 그런 세계가 존재하며 나 또한 그 일부였단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오래 돌아보지 않았으니 기억이 흐릿한 건 당연한 일이리라. 나는 기억을 더듬는 걸 그만 두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선명하게 기억난다. 첸니엔이 그랬듯, 나도 보호자에겐 내가 겪고 있는 상황을 말하지 않았다. 어른들은 자신들의 삶이 너무 버겁고 힘들어 아이들이 어떤 상황을 겪고 있는지 들여다볼 겨를이 없었으니까. 어른들이 나서준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다. 첸니엔이 웨이라이(주이)의 괴롭힘을 신고한 이후에도 그 방법만 바뀐 채 괴롭힘이 계속됐듯, 어른들이 도와줄 수 있는 건 언제나 한계가 있었다. 정 형사(팡인)처럼 아이들이 겪는 고통이 무엇인지 들여다보려고 노력하는 어른조차도 할 수 있는 일이 제한되어 있는데, 그런 노력이 무의미하다 여기는 어른들은 어땠을까. 내가 겪었던 어른들의 대부분은 “잘못한 친구가 먼저 사과하고, 사과를 받은 친구는 용서해주렴” 정도의 수위를 넘어가지 않았다.

그때 그 어른들은 왜 그랬던 걸까? 그들에게 이렇다 할 악의가 있었던 것 같진 않다. 어떤 어른은 한 번도 따돌림의 대상이 되어본 적 없이 자라서 아이들이 겪는 지옥을 잘 몰랐을 수도 있고, 따돌림을 경험해 본 어른들은 그 기억을 지우려 발버둥쳤을지도 모른다. 학교를 빠져나온 뒤 많은 어른들은 성장통을 잊는다. 고개를 돌려 그 시절의 상처를 되돌아보는 게 쉽지 않으니까. 그렇게 자신은 어떤 마음으로 성장했는지를 애써 망각한 어른들은, 자연스레 성장기엔 다들 그러면서 자라니까 이 아이들도 알아서 잘 자랄 거라 생각하며 제 삶에 집중한다. 내가 그랬듯, 김 서린 유리창을 한 장 끼워 넣어 과거의 기억과 지금의 나를 분리하는 거겠지.

<렛미인>(2008)

첸니엔과 샤오베이(이양천새)가 맺는 관계를 보면서 나는 <렛미인>(2008)의 오스카르(코레 헤데브란트)와 이엘리(리나 리안데르센)를 떠올렸다. 첸니엔과 오스카르 모두 어른들의 시야 밖 사각지대에서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한다. 어른들은 자기 삶을 사는 게 바쁘고 아이들이 경험하는 시간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두 사람에겐 자기를 이해해 줄 또래 친구도 하나 없다. 그리고 그런 첸니엔과 오스카르에게 손을 내민 샤오베이와 이엘리는 흥미롭게도, 모두 어른과 아이의 중간 지점에 갇힌 인물들이다. 샤오베이는 돈을 수금하고 주먹을 휘두르는 뒷골목 어른들의 세계에서 살지만, 열세살에 학교를 그만 둔 탓에 아이로 성장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300살이 넘은 뱀파이어인 이엘리 또한 아이의 몸에 갇힌 채 뱀파이어가 된 탓에 온전히 어른이 되지 못했다. 샤오베이와 이엘리 모두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고, 아이를 구하기 위해 어른의 수단(폭력과 초능력)을 행사하는 존재들이다.

뒤집어 말하면 두 사람 모두, 어른에게도 또래 아이들에게도 구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의 외로움을 아는 이들이 만든 캐릭터란 이야기다. 생각해보라. 현실 속에서 뒷골목에서 수금하는 양아치가 날 보호해주고 사랑해 줄 확률은 얼마나 희박한가. 그건 옆집에 이사 온 소녀가 알고 보니 300살 먹은 뱀파이어인데 나와 친구가 되어주고 날 위기에서 구해줄 확률만큼이나 희박하다. 그런 탓에 폭력과 살인을 해법이라 생각하지 않는 관객조차, 샤오베이와 이엘리가 행사하는 폭력을 부정하진 못한다. 그 넓은 세상에 첸니엔과 오스카르를 구해줄 수 있는 이들이 샤오베이와 이엘리 뿐인데, 다른 선택지가 없어서 그들을 상상해내야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는데. 샤오베이가 웨이라이의 목에 칼을 들이대며 첸니엔을 그만 괴롭히라고 협박하는 순간도, 이엘리가 오스카르를 괴롭히던 애들을 물어뜯어 죽이는 순간도, 차마 도덕적으로 옹호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져버릴 수도 없는 것이다.

다시, 나는 초중고 12년을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천천히 되돌아본다. 나는 많은 순간 비겁했고, 그 기억을 돌아보는 건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나처럼 그 기억을 더듬는 걸 일부러 멈춘 어른이 많은 탓에, 누군가는 샤오베이와 이엘리를 상상해야 했던 게 아닐까. 누군가 옆에서 도왔더라면, 그런 상상 속의 존재를 만들어 낼 필요는 없었을 테다. 물론 내가 그 시절을 외면하지 않고 기억해낸다고 해서, 샤오베이의 폭력이나 이엘리의 살육을 대체할 만한 깔끔한 해결책을 생각해낼 수는 없으리라. 운이 좋아봐야 정 형사 정도일 테고, 아주 열심히 노력하면 간신히 어른이 된 첸니엔처럼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 곁에 같이 서줄 수는 있겠지. 그래도 한번 노력은 해볼 참이다. 어른이 된 우리에겐 <소년시절의 너> 속 안챠오나 <렛 미 인> 속 블라케베리의 풍경이 아련한 서사의 배경이겠지만, 지금 아이의 시간을 보내는 누군가에겐 그게 당장 눈 앞의 현실일 테니까.

<렛미인>(2008)
감독
 토마스 알프레드슨
주연 카레 헤레브란트, 리나 레안데르손
시놉시스
눈 내리던 밤, 외로운 소년 오스칼은 옆집에 이사 온 창백한 얼굴의 소녀 이엘리를 만난다. 곧 소년의 가슴 속으로 들어온 이엘리. 두 사람은 서로에게 하나밖에 없는 친구가 되어준다. 하지만 조용하던 마을에서 기이한 살인 사건이 계속되고, 오스칼은 이엘리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