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다. 투어 중 길을 잃어도, 처음 잡은 목표를 잃어도.
평범한 우리가 비틀스처럼 위대한 이들의 여정을 보면서 감정이입을 하는 건 웃기는 일이지만, <비틀스: 에잇 데이즈 어 위크>를 보고 있노라면 자꾸 저게 무슨 감정인지 알 것 같다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처음 시작할 때 즐거웠던 일조차, 시간이 흐르면 자꾸 본질이 아닌 것들이 즐거움을 앗아가는 통에 괴로워지는 일들이 잦지 않나. 숨 돌릴 틈 없이 일을 하느라 일의 의미를 충분히 음미하지 못하는 날들,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환경에서 밀린 숙제 하듯 일을 하고 도망치듯 다음 일정으로 넘어갈 때 찾아오는 부끄러움, 사람들이 나를 나 자신으로 대하는 게 아니라 일의 결과물로 평가할 때 밀려오는 회의감, 사람들 사이에 예의를 차리느라 내 본의를 숨기고 거짓말과 변명을 늘어놓아야 하는 구질구질함.
이런 고통은 꼭 비틀스처럼 눈부신 재능을 지닌 자들만의 것은 아니다. 롭 라이너 감독의 <이것이 스파이널 탭이다>(1984)에 등장하는 밴드 스파이널 탭은 지켜보고 있노라면 한심하기 그지 없는 이들이지만, 이들도 전미 투어가 고통스럽긴 매한가지다. 1964년 비틀스의 영향을 받아 모드족 밴드로 시작한 이들은 비틀스가 그랬듯 사이키델릭으로 빠지기 시작하다가, 다큐멘터리가 제작되던 84년엔 어설프게 헤비메탈로 전향한 상태다. 잘 나가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1000석짜리 객석도 다 채우지 못해 취소되는 공연이 부지기수고, 18피트짜리로 만들어 달라고 주문한 스톤헨지 모형은 오해로 인해 18인치로 제작되어 무대에 오른다.
멤버들의 기행과 반복된 좌절에 지친 매니저는 중도에 팀을 떠나 버리고, 그 자리를 대신해 들어온 리더 데이빗(마이클 맥킨)의 여자친구 지닌(준 채드윅)은 밴드의 미래를 별자리 점으로 가늠한다. 급기야 팀의 공동 리더인 나이젤(크리스토퍼 게스트)이 투어 중 탈퇴를 선언해도 데이빗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그동안 우리 밴드에 있었던 사람을 다 헤아리면 서른 일곱 명이에요. 말인즉슨 6개월 뒤면 더 이상 나이젤이 그립지 않을 거란 이야기예요. 로스 맥클라크니스나 로니 푸딩, 대니 업햄, 리틀 대니 신더와 다를 게 없단 얘기죠.” 20년 동안 멤버가 그렇게나 자주 바뀐 게 뭐 자랑이라고, 데이빗은 카메라를 향해 옛 멤버들의 이름을 주어 섬긴다.
재미있는 건 영화가 개봉한 이후 지미 페이지와 로버트 플랜트, 오지 오스번과 라스 울리히 같은 메탈의 전설들이 모두 입을 모아 스파이널 탭에 대한 애정을 표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메탈리카는 극 중 등장하는 스파이널 탭의 ‘블랙 앨범’에 오마주를 바치기까지 했으니 말 다 했지. 왜 이렇게 한심하기 짝이 없는 가상의 밴드에게 록의 전설들의 사랑이 몰린 걸까? 그건 아마 재능의 유무를 떠나 그 고통은 진실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비틀스처럼 록의 역사를 영원히 바꾼 전설부터 스파이널 탭과 같은 퇴물들까지, 저마다 하는 일과 위치는 달라도 좌절과 방황의 순간 겪게 되는 감정은 대체로 비슷한 법이니까. 상황은 예전 같지 않고, 동료는 더 이상 믿을 수 없고, 하고 있는 일의 성격은 도대체 몇 번이나 바뀌었는지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멀리 돌아와버린 악몽.
우리가 하는 일들은 그 인기나 지명도, 성취와는 무관하게 언제나 우리에게 조금씩의 실망과 좌절을 안겨 줄 것이다. 괜찮다. 우리는 누구나 바보 같은 실수를 하고 처음 출발할 때 겨냥한 좌표를 잃어 버리니까. 중요한 건 새로운 좌표를 잡아서 다시 길 위에 오르는 것이다. 비틀스가 투어를 중단하고 커리어의 남은 절반을 스튜디오 뮤지션으로 보내며 더 위대한 앨범들을 남긴 것처럼, 스파이널 탭이 순진한 일본 팬들의 환호성 속에 어떻게든 커리어를 이어나간 것처럼. 위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영화 속 결말과 달리 스파이널 탭은 영화의 컬트적인 인기에 힘입어 실제로 앨범을 발매하며 활동을 이어 나갔다. 마지막 싱글은 영화 개봉 후 25년이 흐른 2009년에 발매된 싱글 <소시 잭>이다. 어떤가. 이만하면, 말도 안 되게 좌표를 잃어버려 헤매던 한심한 밴드의 결말치곤 썩 근사하지 않은가.
This is Spinal Tap
감독 로브 라이너
시놉시스
마티 디버기(로브 라이너 분)은 몇개의 광고와 영화를 찍은 감독이다. 그러던 그가 밴드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기획했을 무렵 영국의 ‘스파이널 탭’이란 밴드가 미국 투어를 준비 중이란 소식을 접한다. 그는 곳 그들을 밀착 취재하며 ‘힘들게 일하는’ 헤비메탈 밴드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완성한다. ‘This is Spinal Tap’. 데이비드 세인트 허빈즈(마이클 머킨 분)과 네이졀 튜프널(크리스토퍼 게스트 분) 그리고 데릭 스몰즈(해리 시어러 분) 이 주축을 이루고 드러머 믹 슈림튼, 키보드 빕 세비지, 매니저 이안 페이스(토니 핸드라 분)로 이루어진 ‘스파이널 탭’! 파워넘치는 그들의 노래는 그들의 예상을 깨고 미국에서는 연속된 참패를 맛보게 된다. 줄줄이 이뤄지는 공연 취소와 밴드원 간의 마찰은 이들의 좌충우돌을 부채질한다. 더욱이 데이비드의 여자친구 지니가 나타나면서 밴드원 간의 마찰은 극을 달한다. 밴드 회의 중 지니의 지나친 간섭이 맘에 들지 않은 매니져 이안은 결국 밴드에서 탈퇴하고, 그뒤를 이어 매니저일을 보는 지니의 말도 되지 않는 공연 스케쥴 설정으로 네이졀마저 밴드에서 이탈하게 된다. 동네 페어에서 인형쑈 축하공연까지 뛰게 되는 이들의 불행은 바닥도 없이 꺼지는가 하지만 네이졀이 이안과 함께 일본에서의 그들의 인기때문에 일본에서 공연할 수 있다는 소식과 함께 돌아오게 되고 팀은 다시 합체! 일본열도를 불사르며 영화는 끝이 난다. 하지만 ‘스파이널 탭’의 전통인 드러머의 순간인화(?)는 막지 못하고 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