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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비극이어라. 그대는 내가 아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이소라, 바람이 분다) 이별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힘들게 내뱉은 말이지만, 이 말만큼 사랑의 본질을 잘 담아낸 문장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늘 같은 곳을 바라보고 함께 고락을 나누는 것을 사랑이라 생각하고 싶어하지만, 더없이 사랑하는 두 사람도 “그대는 내가 아니”기에 생각을 온전히 공유하는 것엔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그래서 상대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크면 클수록, 우린 저마다 다 제각기 혼자라는 사실을 더 아프게 깨닫게 된다. “내게는 소중했던 잠 못 이루던 날들이” 상대에겐 별 것 아닌 세월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이란.

결혼 45주년 기념 파티를 앞둔 <45년 후>의 케이트(샬롯 램플링)에게도 사랑의 본질은 도둑처럼 불시에 제 모습을 드러냈다. 파티를 일주일도 채 안 남겨둔 어느 날, 알프스에서 실족사한 첫사랑의 시체가 발견됐다는 편지를 받은 남편 제프(톰 커트니)가 혼자 옛 추억에 잠겨 젊은 시절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안 태우던 담배를 태우고, 매번 두번째 챕터도 채 못 가 덮어버리던 키에르케고르의 책을 다시 펼치는 객기를 부리더니 급기야 여행사에 스위스행 비행기표를 알아보는 지경에 이른 제프. 케이트는 모든 게 불안하다. “내게는 천금 같았던 추억이 담겨져 있던” 45년을 기념하는 순간이 코 앞인데, 반세기 전 알프스의 크레바스 앞에서 서성이기만 하는 제프에겐 그 순간이 더 빛나는 추억인 것만 같다. 그러면 이 사람에게 나는, 지난 45년은 뭐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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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트를 보며 나는 <국경의 남쪽> 속 경주(심혜진)를 떠올렸다. 악착같이 돈을 모아 북에 남아 있는 누군가의 탈북자금을 마련하려 했던 남자, 술을 먹고 통일전망대에서 난동을 피우다가 경찰에 잡혀 돌아온 날이면 여윈 등이 더 안쓰러워 보이던 선호(차승원)와 가정을 꾸린 건 좋은 일이었다. “이 사람이 북한 사람이든 이쪽 사람이든 상관없이 무조건 그냥 좋았”으므로, 운명이라 생각하고 살았다. 하지만 그런 경주라도 남편 선호가 전화도 안 받고 한밤중에나 집에 들어오던 날에는 무언가 이상하다 생각했을 것이다. 화면엔 자세히 보여지지 않았지만, 경주라고 불안하지 않았을까? 어느 늦은 밤 입간판 뒤에 옹색하게 쪼그리고 앉아 숨어 있던 젊은 처자가 북한 말씨로 냉면 한 그릇 달라고 말했을 때, 기껏 자리에 앉혀 놓고 돌아보니 어느새 밤의 골목으로 뛰어 도망가던 처자의 뒷모습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만 봐야 했을 때, 경주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선호라고 경주를 북에 두고 온 약혼녀 연화(조이진)의 대체재 삼아 결혼했던 것은 아니다. 남쪽의 친척들에게 배신당하고 탈북 브로커 사기꾼에게 속고 연화가 결혼했다는 소문에 자포자기했던 순간, 새로운 사랑이 찾아왔던 것뿐이다. 그러나 그 순간조차 연화는 포기하지 않고 선호를 찾아 밀림과 사막을 건너고 있었다. 충동적으로 연화와 함께 속초로 떠난 날 밤, 선호는 그 거대한 격차를 뒤늦게 메워보려 “남조선 떠나서 중국이든 미국이든, 안 받아준다 그러면 받아주는 데 어디든” 함께 떠나자고 말해보지만 연화는 다음 날 아침 훌쩍 선호를 떠난다. 연화는 알았을 것이다. 두 사람이 함께 속초에 있는 순간에도 경주는 선호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란 걸. 사랑하는 두 사람의 서사는 언제나 다르게 적히고, 오직 더 사랑하고 기다리는 사람만이 그 사실 앞에 좌절한다는 걸 자신이 겪어 봤으니 말이다.

함께 써 내려 가는 드라마인 줄로만 알았던 두 사람의 관계 안에서, 내가 주연이 아니라 조연에 불과했음을 깨닫는 순간은 언제나 서늘하다. 나는 문득 선량한 청년 선호의 서럽고 먹먹한 이야기를 조연 경주는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늘 아는 얼굴이 있나 하는 표정으로 탈북자 뉴스를 들여다보던 남편,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도 바로 못하고 입안에서 사탕 굴리듯 말하지 못한 사연과 함께 웅얼거리던 남편과 함께 하는 그의 삶은 어떤 색깔이었을까. 물론 추억은 다르게 적히고, 우리는 경주가 아니기에 행복한 얼굴로 가족사진을 찍는 경주의 마음 깊은 곳 천 길 속내를 알 수는 없을 것이나…

<국경의 남쪽(2006)>
South of The Border
감독 안판석
출연 차승원, 조이진, 심혜진
시놉시스
저는 1975년 조선로동당 창건일에 태어났습니다. 이름은 김선호. 만수예술단 호른 연주자이며 고향은 평양입니다. 저에게는 결혼을 약속한 연인 연화가 있었습니다. 성격도 얼굴도 동치미처럼 찡하구 시원한 연화가 난 정말로 좋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남조선에 계신 할아버지와의 비밀편지가 발각되어 전 국경을 넘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연화를 남겨두고 말입니다. 전 연화의 탈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마음이 급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흐를 수록 다신 못 만날 거란 생각에 막막해졌습니다. 그때 제 옆에 다가온 경주는 멍들었던 제 마음을 진심으로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연화가 국경을 넘어 내려왔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오직 한 사람 저를 찾아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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