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하고 아름다운 말들이 우리를 질식시키기 전에
<툴리>(2018)는 축복과 숭고함이라는 수사 뒤에 감춰진 고통을 혼자 감당하는 여성, 마를로(샤를리즈 테론)의 자리에서 시작한다. 마를로의 삶은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의심되는 둘째 조나(애셔 마일즈 팔리카) 하나 만으로도 충분히 힘들다. 마를로는 조나를 진정시키기 위해 매일 밤 온몸을 솔로 쓸어내려 주고, 조나가 원하는 주차장을 찾아 차를 대기를 반복하지만, 아이가 호전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조나는 차 안에서 발을 구르고 소리를 지르며, 사랑만으로 그런 조나를 감당하는 건 쉽지 않다. 학교 교장 로리(가밀라 라이트)는 조나를 “조금 독특한 아이”라거나 “영특한 아이지만 여기 안 맞는 아이”라고 어떻게든 돌려 표현하려 애를 쓰지만, 결론은 자신들이 감당하기에는 “조금 독특한 아이”를 얼른 제적시키자는 이야기다.
이 극심한 피로 위에, 계획에 없이 들어선 셋째 미아가 턱 하고 얹힌다. 부푼 가슴 위에 착유기를 대고 젖을 짜내어 냉동 보관하고, 기저귀를 갈고, 잠투정하는 미아를 달래고, 어질러진 레고 조각을 밟는 일이 반복되는 끔찍한 불면의 밤이 계속된다. 남편 드류(론 리빙스턴)이 조금만 더 육아를 거들어줘도 좋을 텐데, 마를로는 하루 종일 일하다 들어온 드류에게 딱히 일을 맡길 생각은 하지 않는다. 드류도 마를로의 묵인 속에 조용히 침대에 누워 콘솔 게임기나 만지작거리다 기절하듯 잠든다. 미아를 낳고 키우느라 온몸의 살이 트고 부풀어 오른 툴리가 겪는 고통은 이리도 생생한데, 속도 모르는 올케 엘리스(일레인 탄)은 미아 칭찬을 늘어놓는다. “너무 예뻐. 엄마를 똑 닮았네. 입술 좀 봐.”
로리나 엘리스가 아주 틀린 말을 한 건 아니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의심되는 아동 또한 맞춤형 커리큘럼과 꾸준한 노력이 더해지면 훌륭하게 성장할 수 있다. 아이는 예쁘고 찬란한 존재이며 부모들을 위한 축복이다. 하지만 그 말들은 크고 거창해서, 그 뒤에 숨겨진 고통을 주도면밀하게 감춘다. 영유아 보육지원이나 장애아동 교육 지원 시스템이 잘 갖춰진 사회라면, 혹은 그런 일을 대신해 줄 만한 개인교사나 보모를 고용할 만한 재력이 된다면 로리나 엘리스가 하는 말도 나름의 의미를 지닐 것이다. 그러나 마를로는 그럴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조나에게 맞는 학교를 찾고 등록금을 구할 일도 막막하고, 매일 밤 울고 보채는 미아를 돌보는 것도 집안에서 해결해야 한다. 그런 마를로에게 아이들은 독특하고 예쁘고 엄마를 똑 닮은 분신이란 이야기를 해봐야, 그러니 그 모든 고통을 기꺼이 홀로 감내하라는 말 밖에 안 된다. 결국 마를로는 폭발한다. 오빠 크레이그(마크 듀플라스)가 준 번호로 전화를 걸어 야간보모 툴리(맥켄지 데이비스)를 고용하기로 결심한 건 그 때문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 거창하고 아름다운 말들에 질식해서 죽을 것 같았기에.
마를로의 지친 육체를 보며 <디 아워스>(2002)의 세 여자,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와 로라 브라운(줄리안 무어), 클라리사 본(메릴 스트립)을 떠올린 건 그래서였다. 1923년 영국, 버지니아의 남편 레너드(스티븐 딜레인)는 아내의 신경쇠약과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런던의 삶을 접고 교외인 리치몬드로 나와 인쇄소를 운영하고 있다. 경제활동은 남편이 하고, 집안 일은 메이드들이 다 하고, 버지니아는 오롯이 풍광 좋은 리치몬드의 자연을 즐기며 소설 집필에만 몰두하면 되는 상황이다. 그러나 정작 버지니아는 숨막히는 교외의 적막함이 아니라 매 순간 격렬하게 돌아가는 런던의 삶을 간절히 그리워한다.
1951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교외 중산층 가정주부로 살아가고 있는 로라도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남편 댄(존 C. 라일리)은 자신을 지극히 사랑하고, 아들 리치(잭 로벨로)는 귀여우며 뱃속의 아이까지 태어나면 가정은 한층 더 단란해질 것이다. 그러나 이 안정적인 관계는 사실 로라를 어디로도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 두는 족쇄다. ‘모범적인 가정주부’라면 남편의 생일 케이크 정도는 직접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로라는 잘 만들지도 못하는 케이크를 굽는다. 불임 클리닉에 갔다가 자궁에 혹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절친 키티(토니 콜렛)는 로라를 부러워하며 “엄마가 되기 전까진 여자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로라는 ‘모범적인 가정주부’라는 역할을 수행하느라 자신이 무엇을 욕망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진공 속에서 죽어간다.
2001년 뉴욕의 클래리사도 마찬가지다. 그는 성공한 출판편집인이고, 동성애인 샐리(앨리슨 제니)와 함께 살며, 혼자 키운 딸 줄리아(클레어 데인즈)도 훌륭하게 장성했다. 자신이 바라는 것들을 주체적으로 선택하며 살아온 클래리사는 행복해 보이지만, 그 내면은 공허하기 짝이 없다. 지난 몇 년간 에이즈로 죽어가는 옛 애인 리처드(에드 해리스)의 병수발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클래리사의 행복은 리처드와 보냈던 열 여덟 살 여름 한 철에 머물러 있고, 이후의 삶은 온통 그 여름의 그림자를 좇으며 행복을 가장하는 것으로 채워졌다. 죽어가는 옛 애인을 보살펴 그의 시와 소설을 출간해 마침내 문학상을 수상하게 만들고, 그 성취를 과시하기 위해 파티 준비에 매진하는 클래리사의 삶은, 밖에서 두드리면 텅 소리가 날 것처럼 속이 다 허물어졌다.
세 여자의 삶은 당대가 제시한 행복의 기준에 정확하게 부합했다. 1923년에 남편의 지원을 받으며 소설 집필에만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누리는 일도, 1951년에 미국 중산층 가정의 주부가 되어 다정한 남편과 귀여운 아들을 키우며 사는 일도, 2001년에 동성애인과 함께 살며 남편 없이 딸을 키워내고 성공적으로 커리어를 꾸려 나가는 일도, 모두 행복해야 마땅한 일처럼 보인다. 마치 마를로가 자신을 똑 닮은 예쁘고 사랑스러운 셋째 미아를 얻었으니, 기쁨과 환희에 차서 미아를 돌보는 게 마땅한 일인 것처럼. 조나는 조금 독특할 뿐 영특한 아이이니, 그저 조금만 더 신경을 기울이면 되는 일인 것처럼. 개인이 처한 삶의 조건과 그가 지닌 구체적인 욕망에 대한 고민 없이 관습적인 수사를 반복하다보면 세상에 행복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 아이는 축복이고, 장애는 남들과 조금 다른 것일 뿐이며, 가정은 행복이 움트는 곳이고, 성공적인 커리어는 자존감을 고취시키니까. 그런데 과연 그런가?
나는 아득하고 막연한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리는 <툴리>가 안쓰럽다. 구체적인 삶의 조건이 바뀐 건 하나도 없는데도, 마를로와 드류는 어떻게든 함께 상황을 헤쳐 나가려 노력한다. 그건 해법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기어코 행복해지고야 말겠다고 말하는 선언처럼 들린다. 그 선언에 힘을 실어주려면, 해법을 고민하는 일을 관객 모두의 고민으로 끌어안아야 할 것이다. 해법을 찾지 못하고 선언이 무위로 돌아간 순간 <디 아워스>의 세 여자가 마주한 숙명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목격한 나로서는, 그것 말고는 마를로를 위로할 방법을 알지 못한다.
감독 스티븐 달드리
주연 니콜 키드먼, 줄리안 무어, 메릴 스트립
시놉시스
1923년 영국 리치몬드 교외의 어느 하루.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 분)는 오늘도 집필 중인 소설 <댈러웨이 부인>과 주인공에 관한 이야기로 머릿속이 가득하다. 그녀는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는 남편 레나드의 보호를 받으며 언니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다. 저녁 식사 시간을 앞둔 버지니아는 무작정 집을 뛰쳐나가 런던행 기차역으로 간다. 그러나 급하게 그녀를 쫓아온 남편과 팔짱을 끼고 집으로 다시 돌아간다. 잠시동안이라도 벗어나고 싶었다는 사실을 털어놓지 않은 채 기차표를 품 안에 고이 간직하고서…
1951년 미국 LA의 어느 하루.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에 빠져있는 로라(줄리안 무어 분). 둘째를 임신한 채 세살난 아들 리차드와 함께 남편의 생일 파티를 준비하고 있다. 그녀의 오늘은 어제와 다를바 없이 평온하다. 오늘도 남편은 그녀를 깨우지 않기 위해 자신의 생일날 아침을 손수 차린다. 아들 리차드와 함께 남편의 생일 케이크를 만들던 로라는 갑자기 자신의 일상에 염증을 느끼고 아들을 맡겨놓은 채 무작정 집을 나선다. 호텔방에 누워 자살을 생각하던 그녀. 그러나 다시 부랴부랴 남편과 아들이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케이크를 만든다. 둘째를 낳은 후엔 자신의 인생을 찾아 떠나겠다고 다짐하면서.
2001년 미국 뉴욕의 어느 하루.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출판 편집자인 클래리사(메릴 스트립 분). 그녀는 지금 옛애인인 리차드(에드 해리스 분)의 문학상 수상을 기념하는 파티를 준비하고 있다. 어린 시절 자신을 버린 엄마 로라(줄리안 무어)에 대한 상처를 가슴에 묻고 살아온 리차드는 지금 병으로 죽어가고 있다. 꽃도 사고 음식도 준비하고 파티를 위한 만반의 준비를 마친 클래리사는 리차드를 찾아가지만, 그는 그녀와의 행복했던 추억을 이야기하며 클래리사가 보는 눈 앞에서 5층 창 밖으로 뛰어내리고 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