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힐 호텔
1995년, 나는 세번째 전학을 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고작 삼 년 반이 흘렀을 무렵이었다. 계룡대에서 원주로, 원주에서 심곡리로, 이제 용산으로 간다고 했다. 학년이 바뀌면 반이 바뀌듯 내게 학교가 바뀌는 일은 익숙한 일이었다. 학교 애들은 나 말고도 대부분 군인 아저씨네 애들이었다. 아버지가 전근할 때마다 따라가야 했던 우리들은 이별이 익숙했다. 군인 아저씨네 애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 친구가 없다.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한 직후 내게 오랜 벗이 생길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예감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심곡리 애들이랑 헤어지는 일은 이상하게도 힘들었다. 저공비행하는 전투기의 굉음을 들으며 뛰어다니던 우리들. 가장 늦게까지 나와 편지를 주고받은 심곡리 유진이는 중사 아저씨의 딸이었다. 그애의 마지막 편지에는 “우리 엄마와 아빠는 이혼해, 나는 엄마랑 부산에 내려가서 살 거야…… 이제는 전학을 다니지 않아도 되겠지?”라고 적혀 있었다. 용산에 이사간 지 이 년 후, 북한의 황장엽이 심곡리 서울비행장으로 입국했다는 뉴스를 들으며 나는 상공에서 경로 비행을 하던 전투기들의 굉음을 오랜만에 기억해 냈다. 그 소리는 고막을 찢을 듯 시끄러웠다.
나는 용산에 가장 오래 머물렀다. 아버지가 대령으로 진급한 후 이뤄진 전근이었다. 우리 가족은 미8군 관사에서, 다른 부대 관사에서보다 오래 살았다. 나는 미8군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했고, 중학교에 진학해서 한동안 다녔다. 성인이 된 후 만난 친구들은 내가 살았던 곳이 ‘캘리포니아 용산’이라는 걸 신기해했고, 수시로 질문했다.
“거긴 미국 땅이라며. 캘리포니아 주법을 따른다며? 너희 집 주소도 캘리포니아였어?”
“나는 고등학교 때까지도 맥도널드를 먹어본 적이 없는데, 넌 몇 살 때부터 먹었어?”
처음 미8군에 갔을 때 나도 그런 것들이 신기했었다. 이사 후 가족들과 첫 외식을 하던 날을 잊지 못한다. 미군들은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어리둥절해 사방을 둘러보며 걷던 내게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미군 아저씨가 윙크를 하며 손을 흔들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잘생긴 백인이었다. 군복을 접어 올려 드러난 팔뚝이 하루종일 생각났고 가슴이 뛰었다. 시간이 흐르며 그런 것들에 익숙해져, 미군과 눈이 마주치면 내가 먼저 손을 흔들기도 했지만 그 날의 충격은 잊을 수 없었다. 그날 처음 맛본 드래곤힐 호텔의 안심스테이크와 함께.
안심스테이크라는 것을 나는 처음 먹어봤다. 어머니는 내게 서양식 식사 예절을 가르쳐주었다. 냅킨을 무릎에 펼쳐두고 오른손에 나이프를 쥐고 왼손에 포크를 쥐는 것. 수프와 빵을 먹는 방법. 그런 것들을 최초로 배운 날이다. 어머니는 내게 나이프를 쥐여주고 직접 고기를 썰어보라고 했는데, 함박스테이크처럼 숭숭 썰리지도 않고 육즙과 피가 배어나오는 게 징그러워 인상을 썼다. 어머니는 접시를 채가 한입씩 먹기 좋게 스테이크를 썰어주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내 입에는 맞지 않아 찌푸린 채 극기하듯 먹었다. 한국에서는 그만한 고기맛을 맛보기 힘들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미군 부대에 머무르는 동안 우리 가족은 드래곤힐 호텔에서 자주 식사를 했고, 나는 그곳의 카페인 쿠키와 샐러드를 정말 좋아했다.
그런 기억으로 남았다. 미군 부대는. 내가 처음 나이프를 쥐어본 곳. 자전거를 타고 다니던 젊고 친절한 미군 청년들. 버거킹과 배스킨라빈스를 처음 맛본 곳이었고 주말에 외식을 하러 갈 때마다 신나기만 했던 기억. 아직도 PX에서 팔던 이십 리터짜리 거대한 프레즐 봉지 과자를 떠올리면 그리운 마음이 든다.
나는 오랫동안 드래곤힐 호텔이 한남동에 있다고 생각했다.
드래곤힐 호텔은 아직 용산 미군 부대 안에 있다. 얼마 전 블로그 검색을 해보니 그곳에 다녀온 사람들의 후기가 보였다. 블로그 포스팅 제목은 ‘한남동 드래곤힐 호텔’이었다. 그러나 드래곤힐 호텔의 정확한 주소를 알 수는 없었다. 그곳의 주소는 공개되어 있지 않다. 친구들 말대로 그곳은 다만 ‘캘리포니아 용산’이자 이전을 앞둔 USAG(United States Army Garrison)이다. 한남동, 보광동, 이태원, 후암동을 가로지르는 서울 한복판 미군 부대. 나는 그곳을 떠나온 후 한 번도 다시 가본 적 없고, 아버지가 예편한 후 다시 갈 수도 없었다. 중학교에 입학한 기념으로 아버지와 단둘이 드래곤힐 호텔에서 밥을 먹고 나와 스타벅스 커피를 마신 기억이 난다. 그때 아버지는 달러로 계산했었다. 이게 그렇게 특별한 일인지 그때는 잘 알지 못했다. 대학 때 평택 대추리 집회에 다녀온 선배들은 내게 물었다.
“미군 부대에 살았다며? 그땐 어땠냐? 양키 새끼들.”
나는 언제나 하나의 이미지만을 떠올린다. 페달을 힘차게 밟으며 내게 손 흔들어주던 미군 아저씨…… 그의 미소짓는 아름다운 얼굴. 언젠가 어린 시절을 잠시 대추리에서 보냈다는 선배도 그랬다. 우리 아버지는 만날 미군들이랑 평상에서 화투 쳤어.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나는 심곡리 유진이에게 마지막으로 편지를 썼다. 언젠가 여기도 떠난다는 걸 알고 있어. 우리 아빠도 죽을 때까지 군인일 수는 없을 거야. 운전병 아저씨들처럼 언젠가 우리 아빠도 전역하겠지. 그땐 우리 모두 군인 아저씨 애들이 아니야……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나는 아버지가 PX에서 사다 준 편지봉투에 편지를 넣었다. 그때 적었던 우편번호가 캘리포니아 우편번호였다는 건 당시의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멀어져가던 지프에 있던 숫자들이 한국의 다른 차에는 새겨질 수 없는 SOFA 번호판이었다는 것도. 나는 이렇게 말할 뿐이다.
한남동, 아니 미8군 드래곤힐 호텔에서 처음 먹어본 스테이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