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즐거운 일기>(1994)

내일, 내년, 미래

매년 마지막 날에는 간결한 새해 계획을, 이를테면 2022년 12월 31일 결심한 “리드미컬한 인간 되기” 같은 일종의 캐치프레이즈를 궁리하곤 한다. 2023년 12월 31일에는 광화문 광장 서울빛초롱축제 사이를 걷다가 용과 호랑이 동상 곁에 뽀용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조구만 스튜디오 브라키오 캐릭터를 보고 신년 목표를 “용호상박 불꽃 스파크 같은 재밌는 거 많이 구경하기”로 정했고 다음 날 2024년 1월 1일, 난니 모레티 감독 신작 <찬란한 내일로>를 관람한 뒤 극장을 나서며 이런 것이야말로 새해에 만나고 싶었던 바로 그거다 싶어 내일부터는 꼭 새로운 내일들을 매일 환대하기로 마음먹었다. 시네마가 선사한 감동에 영화에서 그리하였듯 팔을 곧게 뻗고 빙글빙글 춤추며 올해만큼은 분명 멋진 걸 두루두루 즐길 수 있겠구나, 시작이 좋으니까! 그렇게 믿었다.

해가 바뀐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상이 여느 때보다 위태롭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단절이 발생했고, 어떤 날에는 고성방가가 오고 갔다. 더군다나 다른 사람들과 있을 때면 자꾸만 내가 사라져 점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비로소 혼자가 된 밤에도 도통 잠들기 힘든 나날이었다. 불안과 자기혐오, 냉소로 가득한 상태가 비교적 최근에 끝났으니 참 오래도 갔다 싶다. 변덕을 겨우 한 방향으로 그러 모아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정신없이 쏘다녔다. 동서양 의학으로, 상담으로. 어쩌다 샤머니즘의 길에도 발을 살짝 담갔는데 미래 예측은 새벽에도 수요가 넘치므로 내가 사는 이 땅이 24/7 전화로도 사주나 타로, 신점을 볼 수 있는 편리한 곳임을 새삼 알게 되었다. 지인들 사이에서 소문난 점성술 선생님도 찾아갔다. 천문대의 관측 프로그램 비슷한 걸 빙글 돌려보더니 기질과 성향, 살아온 과거를 소름 돋게 맞췄다. 어느새 유물론자라고 믿어온 세월을 스스로 배반하게 되었다. 실은 예언의 세계를 믿게 됐다기보다 기복(祈福)의 효과를 믿었다. 상황이 바뀔 거라는 말을 듣고 싶어 찾은 테라피 중 하나였으니까.

<나의 즐거운 일기>(1994)

가려움증 극복하기

어째서 이런 데다 마음도 쏟고 돈도 붓고 있지! 외부에 기대 자신을 잃고 혼탁해져가는 영혼을 돌아보니 좌절도 밀려왔다. 어렴풋하게 난니 모레티 영화 <나의 즐거운 일기>가 떠올랐다. 난니 모레티가 영화감독 난니 모레티를 연기하는 이 영화에서 난니 모레티 역시 집중력을 잃었다. 그는 자신의 있을 곳을 찾기 위해 줄곧 움직인다. 베스파를 타고 로마를 질주하며 찍고자 하는 영화를 떠올리거나, 이탈리아 영화판에 침투한 자본에 인상을 쓴다.(1부 <베스파를 타고>) 편히 시나리오 쓸 곳을 찾기 위해 단절된 섬과 섬을 전전한다. 글쓰기가 도통 쉽지 않은 데다가 여정에 동행한 철학자 친구도 텔레비전조차 없는 현대 문명이 최소화된 섬을 탈출한다.(2부 <섬들>)

그리고 3부. 난니 모레티는 의문의 가려움증으로 고생 중이다. 그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일기에게. 1년 동안의 처방전을 모아놨고 의사들과 만났을 때의 일도 적어놨다. 따라서 이번 장은 그 처방전들과 의사들과의 회견만으로 이뤄질 것이다.”

피부과와 알레르기과를 전전하며 약을 산더미처럼 받아 복용해도, 한여름에 무릎까지 올라오는 양말을 신어도, 식단을 조절해도 가려움은 나아지지 않는다. 소문난 명의를 찾아가도 소용이 없다. 게다가 한 의사는 모든 문제는 심리적일 수 있다며 “모든 문제는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걸 잊지 마세요”라고 충고한다. 벅벅 긁고 또 벅벅 긁어대다 잠들 수 없는 나날. 차도가 없자 다른 방법이 동원된다. 무심코 약에 들어있는 설명서를 읽고 의미 없어 보이는 약을 정리했으며, 백신을 맞기 전 면역학자 친구의 조언도 듣는다. 이제 그는 민간요법으로 눈을 돌린다. 하지만 마사지와 목욕마저도 별 효과가 없다. 한방센터에서 맥을 짚고 침을 맞아도 효과가 없자 전기 치료를 시작한다.

바로 그때, 기침을 목격한 한방의가 흉부 엑스레이를 권한다. 진단명 폐육종. 증상 가려움증 동반. 흉부 사진을 찍은 뒤에야 폐에 생긴 종양이 이 난리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상세히 들여다보지 않았다면 오진이 반복됐을 것이다. 병이 아닌 증상의 주변만 뱅글뱅글 돌다 엉뚱한 부위만 쓸데없이 긁어 생채기만 커졌을 것이다. 세상사가 다 그렇지, 라고 얼렁뚱땅 천연덕스레 넘기려다 그제야 내가 벅벅 긁어 댄 내 몸이 보였다. 나는 어째서 이토록 정신없는 여정을 시작했더라? 고통의 폐부를 명확히 들여다본 적 있던가?

<찬란한 내일로>(2023)

찬란한 내일로

2024년 12월 31일이 오려면 며칠 남았지만, 올해는 조금 일찍 내년 캐치프레이즈를 정해볼까 고민 중이다. “찬란한 내일로”로. 12월, 일상을 뒤흔든 두 사건이 있었다. 희미한 불안에 축 처져있던 나를 번뜩 정신 차리게 만든 것은 대통령과 정부의 계엄령 발동이라는 황당한 사건과 지체할 틈도 없이 재빠르게 광장으로 뛰쳐나와 내일을 말하는 사람들이었다. 기꺼이 서로가 서로를 지키는 동료 시민이 되려 하고 동시에 폭력에 맞서 서로의 목격자 되기를 자처하는 세계가 열린 것이다. 목청 높여 말하는 사람과 나지막이 말하는 사람, 박수치는 사람과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 노래하는 사람과 춤추는 사람… 다양한 정체성의 수많은 사람들이 매일 함께 광장에 모여 행진한다. 회차를 거듭할수록 존재를 존재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시공간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 어우러짐이 빼어나게 아름답다. 가치관과 이념이 충돌하려는 순간에도 반성, 제안, 합의가 이어진다. 왜인지 더 나은 내일로 갈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나라는 개인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매일 배우고 있다.

비슷한 시기,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강연 ‘빛과 실’의 문장들은 변화를 향한 나의 열망을 흔들어 깨웠다. 작가는 고백한다. 1980년 오월 광주 자료를 살피던 중 이십 대 중반 일기장을 바꿀 때마다 적었던 두 개의 질문을 거꾸로 뒤집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작가는 모순이 공존하는 세계를 향해서도 질문을 던진다.

“한편 <작별하지 않는다>를 출간한 2021년 가을까지, 나는 줄곧 다음의 두 질문이 나의 핵심이라고 생각해왔었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나의 즐거운 일기>(1994)

다시 2024년 새해 첫날 본 영화 <찬란한 내일로>가 남긴 일렁임으로 돌아가 보려 한다. 이번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로 난니 모레티가 직접 연기하는 영화감독 ‘조반니’는 난처한 상황에 놓여 있다. ‘56년 헝가리 혁명’을 담은 시대극 촬영을 위해 밤에는 킥보드로 로마 시내를 돌며 로케 헌팅을 다니고 낮에는 항우울제와 수면제로 버티는 고집 센 거장 앞에는, 40년 결혼 생활을 끝내겠다는 아내의 이혼 선언과 파산 직전인 영화 제작사가 놓여 있다. 감독이 꾸려 온 루틴은 곤란함을 입고 고집 혹은 강박으로 변모하고, 자책과 투덜거림도 날로 심해지지만 의외로 여정은 명랑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의외로 답은 과거로부터 연결되어 온 세계를 호명하는 데 있다. OTT가 영화 산업을 잠식한 지금 펠리니와 카사베츠, 조언이 필요한 순간 전화를 받지 않는 스콜세지까지 감독들을 호명하며 다시금 작가주의적 영화사를 짚는 시도도 물론 좋다. 이보다 더 감동적인 것은 과거와 현재를 거리로 이끌어 영화를 둘러싼 모두와 함께 내일로 나아가려는 점이다. 조반니가 영화로 찍고자 하는 70년 전 혁명가들로부터 시작된 소동이 현대의 연대로 합류한다. 그 운동의 물결을 방황하는 일 년 내내 잠시 잊고 있었다. 과거가 미래를 구할 수 있다.

<나의 즐거운 일기> 3부, 조반니의 가려움 증상은 정확한 진단 이후 개선된다. 조반니는 일기에게 회고한다.

“이렇게 해서 하나 배운 셈이다, 아니 두 가지. 먼저 의사들은 말만 할 줄 알지 남의 말을 들을 줄 모른다. 그 바람에 헛돈 써가며 약만 잔뜩 사들였다. 두 번째로 아침 식사 전의 물 한 잔이 몸에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최근 들어 부쩍 무너진 곳을 다시 쌓아 올리려는 움직임이 폭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앞으로 숱한 진단이 나올 것이다. 정확하지 않을 수도, 또 정확할 수도 있다. 그 이후에 나는, 우리는 어디로 가게 될까? 무엇을 배우게 될까? 다만, 한 가지 결심했다. 이 물결에서 나는 먼저 남의 말을 들으려 한다. 수렴하여 침잠하는 대신, 발산하여 떠오르고 싶다. 그렇게 조금씩 찬란한 내일로 건너갈 수 있기를.

 <나의 즐거운 일기>(1994)
원제 Caro Diario
OTT 웨이브(Wavve), 왓챠(WATCHA)
감독 난니 모레티
출연 난니 모레티, 지오바나 보졸로, 세바스티아노 나르돈 외
시놉시스
영화감독 ‘난니 모레티’가 일기에 쓴 세 가지 이야기가 오밀조밀하게 펼쳐진다. 1부 <베스파를 타고>. 모레티는 스쿠터 베스파를 타고 한여름 텅 빈 로마 거리를 누비면서 댄스파티와 극장 주변을 배회한다. 2부 <섬들>. 모레티는 작가인 친구 ‘제라르도’와 시나리오 집필 장소를 찾기 위해 이탈리아 남부의 섬들을 여행한다. 제라르도는 우연히 본 텔레비전 연속극에 푹 빠져 헤어날 줄을 모른다. 3부 <의사들>. 모레티는 가벼운 암에 걸렸던 당시를 회상한다. 그는 심한 가려움증을 치료하기 위해 여러 피부과 의사들을 만나지만 도무지 병이 낫지를 않는다. 제47회 칸 영화제 감독상 수상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