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으로의 긴 여로
잃어버린 시간을 통과하며
요즘 들어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 같다는 착각에 사로잡혀 있다. 당연히 잃어버린 것도 있다. 머리끈, 천 원짜리 지폐, 카페 쿠폰… 잃어버린 지 한참 나중에야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닫는, 찾으면 좋고 아니어도 괜찮은 물건들 말이다. 물건들의 이름을 헤아려봐도 내가 잃어버린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도통 모르겠다. 아마도 내가 잃은 것은 기억력, 집중력, 인내심… 혹은 그리움, 사랑, 꿈, 안정감… 추상적인 것의 소굴, 안개 속에 파묻힌 모양이다. 나는 찾아야 한다. 길을 떠나야 한다. 고속열차처럼 쾌속으로 통과할 것이고, 콘크리트 더미처럼 육중하고 느리게 머물 것이다. 그러니 잃어버린 것을, 시간을 주물러 찾아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카일리 블루스>는 위와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영화다, 라고 쓴다. 안내에 책임감이 없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 영화다. 쏟아지는 졸음을 이겨내고 싶어도 이 영화는 자꾸자꾸 기면을 부른다. 자다 깨기를 반복해서 쇠약해진 것인지, 쇠약한 상태이기 때문에 자다 깨는 것인지 가늠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영화가 어떠한 흐름으로 이동하고 있으며 어디에 당도하려 하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중국의 도시 ‘카일리’에 살고 있는 남자 ‘천성’이 ‘전위안’이라는 도시에 버려졌다는 조카 ‘웨이웨이’를 찾아 떠났다는 사실이고, 영화는 이 여정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천성은 자신의 옛 애인을 만나 전해달라는 동료 의사의 선물을 챙겨들고, 탈것들(기차, 오토바이, 자동차, 나룻배…)에 올라 시간을 실어 나른다. 시가 흐르고, 카일리에 전해 내려오는 원시인 ‘먀오인’ 이야기가 등장하고, 무엇인가가 재촉하고 있다. 시간을 집약하고 응축하다가 2부로 들어서면 40분가량의 기나긴 롱테이크까지 이어진다. 그러니 시간의 리듬을 도통 종잡을 수 없는 이 로드 무비 앞에서 필연적으로 질문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 수수께끼 같은 영화에서 무엇을 봐야 하는가? 카메라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비간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롱테이크를 선호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어렸을 때, 어른들이 카드 게임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걸 참 좋아했어요. 게임이 느리게 흘러가면, 거기에서 특별히 매력적인 리듬이 느껴지더군요. 롱테이크로 찍으면, 이러한 리듬과 느낌을 되살릴 수 있어요. 41분 동안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장면을 통해서 존재와 죽음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고 싶었어요. 이런 방식을 좀 이상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 안에서 마술적 사실주의의 느낌을 감지해 내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잠드는 낮, 깨어나는 밤
탕웨이가 주연을 맡은 2019년 작 <지구 최후의 밤>으로 국내에도 알려진 비간은 1989년에 태어난 젊은 감독이다. <카일리 블루스>는 비간의 첫 장편영화다. 그는 단 두 편의 영화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나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처럼 독특한 시간의 흐름을 펼치는 시네아스트의 영화적 질감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휘고 엮으며 해석했다는 찬사를 받았다.
초여름, <지구 최후의 밤>을 3D로 다시 보았다. 2부, 주인공 ‘뤄홍우’가 안경을 쓸 때 이 동작에 맞춰 3D 안경을 쓰면 영화에 또 한 번 탑승할 수 있다. 나는 형체 없는 유령이 되어 경계 없는 꿈으로 꾀어내는 영화 뒤를 졸졸 쫓았다. 이 마법이 비간 영화가 거는 나른한 주술이자 최면이다. 어떤 면에서 영화 보기는 시간 낭비지만, 영화는 낭비한 것 이상으로 찰나를 다시 돌려준다. <지구 최후의 밤>이 밤의 영화라면, <카일리 블루스>는 낮의 영화다. 오프닝. 형광등이 깜빡거리는 방, 남자가 동료가 건넨 약을 받고 난 후 검은 화면에는 금강경 구절이 떠오른다.
“부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었다. 저 모든 나라에 살고 있는 모든 중생의 갖가지 마음을 여래는 다 아나니 어째서 그러하겠는가? 여래가 말한 마음은 실제 마음이 아니라 그 이름이 마음일 뿐이니라. 그 까닭이 무엇인가? 수보리야, 과거의 마음도 현재의 마음도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아무래도 몽롱한 연말이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나 훌쩍 지나버렸다. 현실인가 꿈인가? 믿든 믿지 않든, 알든 알 수 없든, 끔벅이는 눈으로 운동하는 시계를 멈춰 바라보든 잽싸게 통과하든, 일단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무너짐에 관한 비통한 소식이 매일 아침 들려온다. 우리는 점점 더 폐허가 되어가는 폐허에 살고 있다. 비간의 카메라는 폐허의 시간을 앞지르고 거슬러 간다. 지름길도 갈림길도 알고 있다. 어떤 이는 머물러 있고 어떤 이는 이미 떠났다. 그 사이를 환상이 불러일으키는 두려움이 뒤쫓는다. 어쩌면 우리의 목표는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기억해 내는 것이 아닐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것을 잃어버린 채로, 무언가를 찾아 나서기 위해 이미 길을 떠나왔다는 것, 이를 체험하는 감각일 것이다.
원제 路边野餐
OTT Wavve, TVING
감독 비간
출연 진영충, 곽월, 린얀 리우, 페이양 루오, 사리 순 외
시놉시스
안개가 자욱한 도시 카일리. 의사 겸 시인 천성은 그곳에서 유령 같은 삶을 살고 있다. 꿈에서 연거푸 돌아가신 어머니를 마주한 천성은 버려진 조카를 찾기 위해 카일리를 떠나 전위안으로 향한다. 그길에서 당마이라는 자그마한 마을을 통과하게 되고 천성의 과거, 현재, 미래가 꿈결 같이 뒤섞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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