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주의에 빠지지 않고 빈칸을 채우는 법
얼마 전 퇴사했다. 이로써 오랜 직장 생활을 마무리하고 나는 프리랜서가 됐다. 당연히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나를 여기까지, 이 어려운 결단까지 몰고 온 건 ‘live for’라는 끈질긴 질문이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살고, 무엇 때문에 이 일을 하고 있는 거지?
젠장. 이 질문이 내내 따라다니지만 않았어도 나는 그럭저럭한 월급쟁이로 한두 달에 한 번씩 소고기도 사 먹고, 한두 해에 한 번씩 유럽까지는 아니어도 동남아 여행도 다닐 텐데. 내가 무얼 위해 산들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하고 세상에 무슨 큰 도움이 된다고-
-라는 생각은 크게 들지 않았다. ‘젠장’ 이후의 저 말들은 그러니까, 농담. 더 늦기 전에 ‘live for’에 대한 답을 찾아 나선 것이, 내가 찾은 답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들어서서 그 길을 한 발짝 내디뎠다는 사실이 나에게 안도감을 준다. ‘live for’ 뒤에 이어질 빈칸을 채우는 건 내가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고, 더 늦어져서는 안 될 일이기에 그 빈칸이 빈칸이라는 속성에 걸맞게 막연하고 텅 비어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일으킴에도 그 칸을 응시하는 지금이 더 충만한 것 같다.
썼다 지웠다 썼다 지웠다… 빈칸에 ‘돈’을 썼다가 ‘명예’를 썼다가 지우개를 들었다가 놓았다가 그러다가 문득 이 노래가 떠올라서 오랜만에 듣기도 했다. 예전에 닳도록 들었고 지금도 내 플레이리스트에서 장기 투숙 중인 Alicia Keys의 ‘If I Ain’t Got You’.
Some people live for the fortune
어떤 사람들은 돈을 위해 살고
Some people live just for the fame
어떤 사람들은 오직 명예를 위해 살아요
Some people live for the power, yeah
어떤 사람들은 권력을 위해 살고
Some people live just to play the game
어떤 사람들은 그저 즐기려고 살아요
전에도 들을 때마다 알 수 없는 울림을 느꼈지만, 지금 내 상황이 이래서인지 가사가 더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너는 어떤 류의 ‘some people’이냐고, 무얼 위해 살기를 진정으로 원하느냐고 내게 말을 걸어 묻는 것 같았다. ‘어떤 사람들은 다이아몬드 반지를 원하는데(Some people want diamond rings)’ 너도 그걸 원하니? ‘어떤 사람들은 모든 걸 원하는데(Some just want everything)’ 혹시 너도 부와 명예와 권력 그 전부를 원하니?
아직 볼펜 대신 연필을 들고 빈칸을 채우는 중이다. 틀렸을지언정, 일단 내가 생각하는 답을 채워 넣고 그 길로 가 본다. 돈을 많이 벌길 원하지만 물질적인 것들이 내면을 정의한다고 믿는 피상적이고 가식적인 some people이 되고 싶진 않다. 명예? 글쎄…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긴 하지만 예전만큼 이 욕망이 강하진 않은 것 같다.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 이 목적을 위해 사는 것도 좋지만 나를 사랑하고 자신을 먼저 행복하게 해주지 않은 상태에서 남을 위해 애썼을 때는 묘한 불만이 남기도 했다. ‘그럼 내 행복은? 나는 누가 위로해주지?’ 이런 생각이 든 적도 있었다.
But everything means nothing
하지만 모든 게 다 부질없어요
If I ain’t got you, yeah
내가 당신을 가질 수 없다면 말이죠
노래는 결국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없다면 그 모든 ‘live for’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빈칸에 들어갈 하나의 단어를 찾은 화자가 부럽다. 더군다나 그 빈칸이 사랑하는 사람이어서 더 부럽고. 빈칸을 자꾸 썼다 지우다 보면 어느 순간 모든 게 다 부질없게 느껴지는 허무주의에 빠질 때도 있겠지만 여전히 나는 믿는다. 나만의 정답이 있을 거고 내가 그걸 찾아내든지, 아니면 내가 쓴 그 답을 정답으로 끝내 만들든지, 그럴 수 있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