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도, 약간의 진실을 섞은 거짓된 연대기>(2022)

척추위생과 술래잡기

정형외과 진료실. 책상 위에는 아름답고 부드러운 곡선을 자랑하는 척추 모형이 올곧게 서 있다. 의사는 쏘옥 들어가고 포옥 나온 유려한 뼈마디를 짚으며 엑스레이로 시선을 돌린다. 휘어야 하는 부분은 곧게 뻗은 채로, 뻗어야 하는 부분은 구부정하게 굽은 채로 엉망진창인 내 뼈 사진이다. 의사가 엄중한 경고를 전한다. 아무리 봐도 엑스레이 속 내 척추는 넌 왜 이렇게 게으르고 못난 인생을 살아왔냐는 책망이라도 하듯 상상 이상으로 심히 못생겼다. 당혹스럽지만 익숙하지만 어이없지만 알고 있지만… 그래, 내가 그렇게 살아 온 것이고…

어느 날 친구가 유튜브 채널 정선근 TV를 소개해주었다. 서울대학교 재활의학과 병원 정선근 교수는 “척추위생”을 강조한다. 나는 미래를 향한 살벌한 예고와 개선 가능한 방법을 잔뜩 봐왔으면서도 여전히 습관적으로 다리를 꼰다. 지금도 그렇다. 분명 내 몸속을 뚫어져라 간파당한 정형외과 진료실에서도 그랬을 것이다. 꼼짝 없이 내가 내게 잡히고 만 것이다. 젤리를 숟가락으로 떠 올리듯 살 속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을 수 있다면 뼈마디를 우두둑우두둑 재조립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럴거면 엑스레이 같은 건 찍지 않는 편이 좋았을텐데라는 비껴간 생각을 하면서. 무언가를 들킨 것만 같아 화끈거리는 얼굴을 하고서.

나처럼 술래가 되고 싶지 않은 남자가 있다. 조국 멕시코에 돌아온 실베리오는 현실과 픽션을 섞은 장르 ‘다큐 픽션’으로 미국에서 성공한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이다. 조만간 미국저널리즘협회 수상을 축하하는 파티가 열릴 것이며, 정치적 관계가 복잡한 중남미의 탄압을 피해 미국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로서 친구가 진행하는 티브이 쇼에도 출연할 것이고,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앞으로 이어질 작업의 힌트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영광과 손가락질을 동시에 감내해야 할 것이다.

<바르도, 약간의 진실을 섞은 거짓된 연대기>(2022)

환상의 연쇄를 겪고 나면

이 영화 <바르도, 약간의 진실을 섞은 거짓된 연대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기다란 그림자가 사막을 달린다. 그림자는 광활한 대지 위를 높이 날아오른다. 그림자는 금세 착륙한다. 전환. 기다란 병원 복도 끝, 한 남자가 푸석한 얼굴로 의자에 걸터앉아 있다. 분만실의 의사가 말한다. “아기가 다시 들어가겠대요” 전환. 복도의 남자가 힘 없이 늘어진 탯줄을 끌고 나오는 여자에게 묻는다. “어떻게 됐어?” 그녀는 답한다. “배 속에 있겠대” 탯줄이 턱, 팽팽하게 걸리는 순간 남자는 저벅저벅 걸어가 탯줄을 끊는다. “이제 어쩌지?”, “모르겠어”, “애가 어떻게 영양을 공급받냐고”, “날 갉아먹겠지, 뭐. 당신도” 둘은 피 묻은 탯줄을 질질 끌고 복도 멀리 사라진다. 이어지는 영화 타이틀. 세상 밖에 나오기를 거부한 이 아이는 실베리오의 아들 마테오다.

이처럼 이 영화를 읽어내는 것은 순탄치 않다. 정착할 틈 없는 경계인인 실베리오의 삶이 만들어내는 장면을 도무지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이리저리 튀는 컷처럼 이야기는 쓸어 넘길 수 없이 장황하게 꼬여 있고, 과잉과 집착과 발버둥이 착란을 일으킨다. 그가 만드는 작품도 이와 같을 것이다. 그의 삶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를 구별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사적인 진실과 공적인 역사와 기록되지 못한 이들이 만들어내는 복잡한 환상이 거듭 끼어들고, 이 환상은 끝없는 불안을 거쳐 긴 그림자를 낳는다.

실베리오는 자기 비하와 비꼬기, 정신 착란을 오가며 꼭대기에서 죽음들이 쌓인 땅으로 투신 충동을 느낀다. 하지만 결코 스스로 뛰어내리지 못한다. 그렇다면 경계에 선 그는,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절망감과 무력감에 피곤함이 몰려온다. 누군가는 이를 과한 자의식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그는(혹은 이 영화 <바르도, 약간의 진실을 섞은 거짓된 연대기> 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는) 가로축과 세로축을 켜켜이 쌓아 혼란을 압도적인 화면으로 보여준다. 구부정한 우리는 기이하고 복잡하다. 그래서 오히려 미래를 향한 기대를 품게 된다.

어떤 땅의 죽음은 긴 시간 외면, 왜곡, 숭배를 겪으며 어지럽게 엉켜있다. 마테오의 죽음은 커다랗게 확장되어 멕시코 땅 전체에 퇴적된 죽음으로 이어진다. 다큐멘터리는 어떤 땅에서의 죽음과 진실을 쌓고 엮어 세상에 외치려는 장르다. 그렇게 이 영화는 새삼 우리가 죽음의 퇴적물을 딛고 살아있음을 말하려 한다. 동시에 죽음과 윤회 사이를 떠도는 49일간의 중간계를 뜻하는 제목바르도처럼 49일 동안 떠돌며 환상의 연쇄를 겪고 나면 모래처럼 흩날려 쌓여가는 존재임을 느끼게 한다.

 <바르도, 약간의 진실을 섞은 거짓된 연대기>(2022)
OTT 넷플릭스
원제 Bardo, falsa crónica de unas cuantas verdades
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시놉시스
뛰어난 영상미와 몰입의 경험을 선사할 장대한 영화 <바르도, 약간의 진실을 섞은 거짓된 연대기>는 멕시코 출신의 저명한 저널리스트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인 실베리오가 로스앤젤레스에서 고향인 멕시코로 떠나는 사적이고 감동적인 여정을 그린다. 명망 있는 국제 시상식의 수상자로 지명된 실베리오는 고국을 다시 찾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낀다. 그때는 이 간단한 여행이 자신을 실존적 한계로 몰고 가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다. 그가 경험하는 기억의 어리석음과 두려움이 현재로 관통해 들어오면서 실베리오의 일상은 당혹감과 경이로움으로 채워지게 된다. 실베리오는 때로는 뭉클하게, 또 때로는 웃음을 자아내며, 보편적인 동시에 매우 사적인 질문들을 붙들고, 씨름하기 시작한다. 정체성, 성공, 죽음이라는 한계, 멕시코의 역사, 그리고 아내, 아이들과 공유하는 가족이라는 깊은 정서적 유대까지 그의 질문은 이어진다. 그리고 이 매우 독특한 시대에 과연 인간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