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의 풍경>(2021)

붕괴 이후의 붕괴

올해의 단어 하나를 선정해야 한다면, ‘붕괴’가 아닐까. 사전적 의미로는 ‘무너지고 깨어짐’. 그리고 영화 <헤어질 결심> 속 해준의 대사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라는 심해를 닮은 깊은 사랑에 빠졌음을 시인하는 자백에 가까운 고백… 그러니까 이 단어가 삶을 지배하고 있다는 설명을 덧붙이자면, 지난봄, 서예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천자문 쓰기가 지겨워질 때쯤 미리 받아 둔 친구들의 한자 이름이나 불현듯 떠오르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 쓰는 것으로 시간을 때우고는 하면서 아무래도 지금까지 가장 많이 쓴 단어가 붕괴인 것만 같고, 올해 인상 깊게 본 모 드라마 OST 수록곡 제목이 우연히 붕괴였다거나, 이제는 너무 빠져버린 무언가 앞에서 자꾸 붕괴를 외치다 보니 붕괴라는 단어가 붕괴되는 게슈탈트 붕괴 현상까지 얘기하지 않더라도…

미아 한센-러브 감독의 영화 <베르히만 아일랜드>는 잉마르 베리만의 섬으로 알려진 ‘포뢰섬’을 찾은 남녀의 이야기이다. 영화를 쓰고 찍는 둘은 영감과 창작을 위해 섬 곳곳을 누비며 베리만 영화의 흔적을 찾는데, 영화 초반 1973년 베리만이 만든 TV 시리즈이자 영화인 <결혼의 풍경>에 등장했던 침실에 누워 (사랑과 관계, 젠더 위계의 긴장감이 빚어낸 싸움에 지겹게 휘말릴 자신들의 미래를 예측하지 못한 채) 이 작품이 수많은 커플을 이혼하게 만들었다는 가벼운 농담을 나눈다. 둘의 농담에 등장하는 베리만의 <결혼의 풍경>이 2021년 방영된 HBO 오리지널 시리즈 <결혼의 풍경>으로 리메이크됐다.

시리즈의 주연을 맡은 두 배우 제시카 차스테인, 오스카 아이작이 백스테이지에서 촬영장으로 걸어 들어간다. 카메라를 비롯한 기기 사이, 촬영이 시작되면 두 배우는 작품 속 캐릭터 미라와 조너선으로 변신한다. 1화. 낮. 거실 소파에서 둘은 부부 관계를 주제로 한 논문 인터뷰에 응한다. 일과 가정의 양립부터, 가정 내 역할, 섹스에 이르기까지 결혼이라는 관계의 본질을 꿰뚫는 질문이 이어진다. 저녁. 이웃 부부와의 ‘폴리아모리’에 관한 대화. 결혼이라는 계약 관계를 유지하면서 배우자가 다른 상대방에게 감정적으로 사랑을 느끼는 상태를 인정할 수 있을까?

카메라는 곧 무너지고 깨어질 관계의 틈을 암시라도 하는 듯 집요하게, 때로는 멀찍이 거리를 두고 인물들의 대화 속 미묘한 입장차를 관찰한다. 다음 회차로 전환이 이뤄지는 클로징. 카메라는 이들이 함께한 자리들—바깥에서 본 집과 실내의 여러 구석들, 창밖 같은—에 조용히 머무르기를 선택한다. 마치 연극의 인터미션임을 알려주면서 혹은 새로운 막이 열릴 것임을 선언이라도 하듯이.

사실 미라와 조너선은 대학 동창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직업뿐 아니라 출신 배경이 전혀 다르다. 출산 후 테크 회사에서 임원으로 일하는 미라는 바쁜 일상을 보내며 승진을 눈앞에 두고 있다. 비교적 유동적인 일정으로 재택근무가 가능한 대학교수 조너선은 4살 딸 에이바의 육아를 주로 도맡는다. 대학 시절 쿨한 삶을 즐겼던 미라와는 달리 엄격한 유대인 집안에서 자란 조너선은 규율에서 탈출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 조너선은 미라에게 안정감을, 미라는 조너선에게 자유를 알려주었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임신과 낙태, 변해버린 감정, 젠더 격차, 소통 부재와 외로움, 솔직하지 못함, 과신 같은 감정들이 녹아든 이상 이들의 관계는 지속될 수 없다. 그러나 결혼이 남긴 크고 작은 알갱이는 잔여물이 되어 지지부진하고 지리멸렬하게 이어지면서, 게다가 익숙함과 새로움이라는 야릇한 감정까지 섞여 쉬이 관계를 끝내지 못하게 한다. 그렇게 붕괴 이후에도 붕괴가 계속된다.

<결혼의 풍경>(2021)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하려는 우리는

<결혼의 풍경>은 계약 기반의 결혼이라는 관계의 끝이 지지부진하게 이어질 때, 사적인 사이에서는 권력관계가 끝없이 역전되는 것처럼 보여도 젠더 역할이 크게 변화한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위계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제작진은 이를 제시카 차스테인과 오스카 아이작의 숨 막히는 연기와 쏟아지는 말들로 밀도 있게 담아냈다. 특히 제시카 차스테인이 펼치는 있을 곳을 찾으려는 한 여성의 갈망하는 눈, 귀를 매만지는 불안한 손, 지친 뒷모습 같은 연기 디테일이 보는 이의 마음에도 그늘을 드리운다.

진은영 시인이 10년 만에 펴낸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에 수록된 첫 시 「청혼」은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로 시작해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 조각처럼”으로 끝난다. 시인은 한 인터뷰에서 이 시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결혼과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맹세를 한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 이런 것들을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게 되는 그런 즈음에 썼습니다. 사랑은, 완벽한 사랑은 없고 사랑의 태도만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한 존재에 대한 성실한 태도가 사랑인 것 같아요. 내가 사랑이라고 생각하는데 정확하게 그 사랑이 전달되는 경우는 관계에서 쉽지 않은 것 같거든요. 우리는 항상 사랑할 때 정확하게 사랑하지 못해서 실패하는 경험들이 가득한데 그러한 때 그 사람 곁에 있고, 끊임없이 실패하더라도 그 사람과 함께 하겠다는 다짐 같은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수많은 우리는 결혼의 산물이다. 그리하여 나는 때로 내 존재에 관해 수많은 의문을 품어 보고는 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나라는 존재는 낭만적 사랑의 결과물에 가깝다. 가장 확실한 것은 계약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이 두 명제는 나란히 둘 수도 있고, 위아래에 둘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내 안에 남아있을 사랑의 다짐과 맹세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할까? 하지만 연이어 떠오르는 생각 수도꼭지를 잠그고 내뱉고 싶은 말들을 꿀꺽 삼키게 된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모든 생각과 말이 잔잔한 불안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정확하게 사랑하기 위해 충돌하고 실패의 슬픔을 끌어안으려 한다. 붕괴 전후라든가 그 이후에도, 나의 물컵이 지저분하더라도, 텅 비어있더라도, 날카로운 유리 조각만이 남아있더라도.

<결혼의 풍경>(2021)
OTT 웨이브(wavve)
원제 Scenes From A Marriage
감독 하게이 레비
출연 제시카 차스테인, 오스카 아이작
시놉시스
결혼 10년 차 부부인 미라와 조너선은 결혼 생활을 이어 가려 노력하지만 순탄하지만은 않다. 잉마르 베리만이 제작한 동명의 시리즈를 각색한 작품으로, 미국 커플의 사랑, 증오, 욕망, 결혼과 이혼에 대한 생각을 보여주는 드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