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브란스: 단절>(2022)

“(…)고통, 그것은 밤새도록 잠을 파헤치는 쟁기질입니다. 그리고 낮 또한 파헤칩니다. 견딜 수 없이 힘듭니다”
– 프란츠 카프카 *

* 프란츠 카프카, 배수아 역, 『꿈』, 워크룸, 31p.

상실을 단절하기

남자는 퍼석한 얼굴로 울고 있다. 싸늘한 겨울 아침, 그는 손목시계를 확인하더니 사원증을 매고는 차에서 내려 회사로 향한다. 칼날 같은 직선과 육중한 두께가 돋보이는 회사 ‘루먼’의 건물 내부로 들어가면 군더더기 없고 극도로 기능적인 오피스의 세계가 펼쳐진다. 사생활의 흔적을 벗고 엘리베이터에 올라 출근의 문이 열리는 순간,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충혈된 눈으로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을 흘리던 바깥의 남자는 사라졌다. 대신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은은한 표정과 흐트러짐 없는 단정한 매무새가 돋보이는 사무직 노동자가 있다.

이 남자의 이름은 마크. 오늘은 마크의 동료 피티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된 날이자, 도무지 시스템에 적응할 것 같지 않은 반동적 신입 사원 헬리를 만난 날이며, 권위적인 상사 코벨로부터 매크로 데이터 정제팀(MDR) 팀장으로 승진을 명령 받은 날이다.

<세브란스: 단절>의 주 무대 대기업 루먼이 개발한 ‘단절(Severance) 수술’은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의 혁신처럼 느껴진다. 뇌에 칩을 삽입하면 ‘회사 안의 나(이니, Innie)’는 ‘회사 밖의 나(아우티, Outie)’를 잊는다. 서로의 기억은 호환되지 않는다. 출근한 이후로는 가족과 나의 역사는 물론 이웃도 친구도 연인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퇴근하는 순간, 루먼에 다닌다는 사실 외에 직무도, 사내 관계도 전혀 알 수 없다. 완벽한 자아 분리는 마치 달콤한 꿈 느껴진다. 스위치를 켜고 끄면 골치 아픈 회사 일도, 감정적인 가정사도 끼어들 틈 없어지는 목적에 충실한 간결하고 완벽한 세계.

하지만 이 시리즈는 자아와 감정의 단절을 긍정하려는 드라마가 아니다. 오히려 스멀스멀 조여오는 신자유주의적 생산성의 압박감과 긴장감을 롱테이크의 호흡과 대칭적이고 건조한 세트 이미지에 덧입혀 자본이 노동하는 신체를 통제하는 방식을 우회적으로 들여다보는 SF 스릴러이자, (마지막 에피소드를 향해 달려갈수록 올해 여름 본 어떤 공포영화보다도 오싹하기 이를 데 없어지므로, 궁극적인) 호러에 가깝다. 도무지 목적을 알 수 없는 업무인 모니터 속 숫자 잡아내기, “소중한 직원들이여 나약함을 극복하라” 같은 회사 곳곳에 새겨진 CEO 캐리 이건의 명언들, 긴장을 해소하는 책상 위 장난감부터 댄스 타임이나 와플 파티 같은 크고 작은 보상과 매끄러운 동기부여, 휴게실이라고 이름 붙여진 방에서의 정신 개조 장면은 과장되어 있어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실제 우리가 일하고 있는 현실과 닮아있어 섬뜩하다.

회차를 거듭할수록 고도로 통제된 생산성의 세계에 균열이 생긴다. 역사학 교수였던 마크가 단절 수술을 택한 이유는 활력 있는 회사생활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루 단 몇 시간 만이라도 아내를 잃은 상실감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고통은 앞서 인용한 카프카의 편지 구절처럼 밤과 낮을, 꿈을 파헤치기 때문에 진정제가 필요하다. 그러나 상실과 단절됐다고 믿어 왔던 마크는 피티의 부재에 흔들리고 회사 밖에서 복원에 성공한 그를 만난 이후 차츰 시스템에 의문을 품는 단계로까지 나아간다.

MDR 구성원들도 모두 마찬가지다. 퇴사 실패의 무한 루프를 멈출 수 없는 헬리는 절망을 거듭하다 본질적인 의미의 탈출, 죽음을 시도하기에 이른다. 한편 그 누구보다도 회사 이념을 숭배했던 어빙은 창업자 가문의 성화(聖畫)를 그리는 광학 및 디자인팀(OD) 버트와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빠지고, 딜런은 우연히 회사 밖 자신의 실마리를 발견한다. 이들은 스스로에게, 시청자에게 심원한 윤리적 질문을 던진다. ‘나는 누구인가?’, ‘나를 통제할 자유는 누구에게 있는가?’, ‘나다운 것은 무엇인가?’

<세브란스: 단절>(2022)

운명을 복원하기

믿음 없는 어른으로 성장한 데에는 어린 시절 성당에서 새 접이식 자전거를 도둑맞은 일이 컸다. 미사를 마치고 나와보니 그 시절 생애 가장 큰 기쁨이었던 선물이 영영 사라진 것이다. ‘성스러운 공간에서 도둑질이라니! 신은 없다!’ 그런데 가끔은 나를 채찍질하는 개념을 향해서는 무한한 믿음이 생긴다. 루먼 CEO가 제시하는 9가지 키워드 “비전, 열정, 위트, 쾌활, 겸손, 박애, 영리함, 청렴, 책략”이 그렇다. 노동하는 시간에는 특히 그러한데, 이들 개념이 신보다 더 신처럼 느껴질 때면 내 모자람을 책망하다 못해 유능한 기계가 되고 싶은 욕망을 맛보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과의 말들 앞에서 사랑, 우정, 유대, 관계, 그리고 우리 같은 단어는 쪼그라들어 힘을 잃고 만다.

<세브란스: 단절>에는 인물들을 각성시키는 책이 등장한다. 마크의 매부 리큰이 쓴 책 『당신다운 당신(The You You Are)』은 운명(Destiny)에 관해 이렇게 서술한다.

“D는 꿈꾸는 것, 모든 것의 시작. E는 에너지, 벽을 허무는 것. S는 책임, 집과 땅을 책임지는 것. T는 공포, 우리를 더 가치 있게 하는 것. I는 눈, 사랑으로 우릴 지켜보는 것. N은 새로움, 비처럼 쏟아지는 것. 그리고 Y, 지금 우리가 고민할 필요가 없는 질문. 친구들이여, 운명이 우릴 그곳으로 인도하리라”

반전이 몰아치는 시즌1 마지막 회 9화의 제목은 ‘우리다운 우리(The We We Are)’다. 갑자기 로맨스 영화의 진부한 대사가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그의 연인이 말한다. “너답지 않아” 그의 연인이 답한다. “나다운 게 뭔데?” 예측 불가능한 나의 삶, 그 운명을 복원하는 일은 한편으로 낡은 질문에 깃들어 있다. 형형한 눈으로 세계를 뚜렷하게 바라보기 위한 단 하나의 조건은 거울을 향해, 그리고 바깥의 우리를 향해 끊임없이 묻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세브란스: 단절>(2022)
OTT 애플 TV+
원제 Severance
감독벤 스틸러
출연 애덤 스콧, 브릭 로워, 패트리샤 아케트, 제크 체리, 존 터투로
시놉시스
마크는 시술로 직장 생활과 사생활의 기억이 나뉜 사람들로 이루어진 부서의 팀장이다. 회사 밖에서 의문에 싸인 동료가 나타나면서 그들의 일에 대한 진실을 밝히는 여정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