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어 선생님 My Octopus Teacher>(2020)

가구가 되어버릴까 봐

어영부영 새해를 맞이했다. 매일 지겨운 바이러스 이야기를 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어져 버렸다. 한편으로는 “코로나 때문에”라는 핑계로 새해 결심을 미룰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무척 아이러니하게도 목표를 달성하고 성취해야 할 것 같은 연초의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애써 나를 포장해 어울리지 않는 매대에 내어놓지 않아도 되고, 새로움 강박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멈춰있다 보니 자꾸만 살아있다는 감각을 잊어버리게 된다. 언젠가 친구가 늘 비슷한 키를 유지하는 자기 집 몬스테라를 두고 “이젠 뭐 거의 가구 같다”고 말한 적 있는데, 요즘 불쑥 가구가 되어버린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몇몇 기능이 탑재되어 있는, 그러니까 지금 나는 타이핑 하는 가구…

무한한 생명력을 느끼고 싶어서 넷플릭스에서 자연 다큐멘터리를 찾기 시작했다. 작년 가을 즈음 동료가 <새들과 춤을>에 빠져 산다고 했다. 일주일 내내 새들이 펼치는 구애의 몸짓과 짝짓기를 바라보면서 삶의 방향성을 가늠한다나 뭐라나. 그때만 해도 몰랐지, 곧 내가 그렇게 될 거라는 걸. 나는 새가 아닌 문어를 택했지만.

<나의 문어 선생님>은 ‘살아있음’에 관한 다큐멘터리다. 슬럼프를 겪던 영화감독이 고향으로 돌아가 검고 푸른 바다에 뛰어든다. 잔혹하게 느껴지는 바다에 적응하는 순간, 감독은 평온이라는 아름다움을 만난다. 바다의 추위마저 갈망하게 될 만큼 해초 숲 다이빙에 매료된 그는 우연히 암컷 문어 한 마리를 발견한다. 그때부터 그는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매일 바다에 나가 문어의 일평생을 집요하게, 그리고 애정어린 시선으로 쫓는다. 열정 어린 탐구 사이, 알록달록하고 흐물흐물하고 매끈매끈한 다양한 해양 생물들이 다시마 숲을 가르며 유영하는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풍경이 모니터를 가득 채운다.

내 손을 잡아줘

상대방의 일상이 궁금해지는 순간부터 사랑은 시작된다. 그러다 멀찍이서 나를 지켜만 보던 상대방이 손을 내밀었을 때, 사랑의 크기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처음 잡으려던 순간을 기억해보자. 천천히, 아주 수줍게 내민 손끝에서 서로를 향한 강렬한 호기심이 일렁일 때의 결심. ‘나는 네 끝까지 마주하고 싶어’. 이 매혹의 순간을 <나의 문어 선생님>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감독을 탐색하던 문어가 처음으로 자신의 다리를 감독의 손으로 뻗은 순간, 과장을 보태어 <아바타>의 머리카락 교감을 처음 보았을 때 만큼이나 경이로움이 전해진다. 감동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파자마 상어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단시간에 주위의 돌과 조개껍데기 100여 개를 재빠르게 주워서 빨판에 붙여 위장하는 문어의 모습에 비친 산다는 일의 위대함. 주어진 삶을 어떻게든 살아내기 위해 나는 어떤 조개껍데기를 주웠던가.

서로 다른 존재의 전적인 믿음과 유대감, 다름을 인정하고 자연의 순환을 따르는 방식, 살아남기 위한 재빠르고 창의적인 몸부림,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는 회복 능력. 모두 ‘생각하고, 느끼고, 탐험하는 존재’ 문어 선생님에게 배운 것이다. 나는 내년 새해에도 문어 선생님을 찾을 것이다.

<도시인처럼> Pretend It’s a City>(2020)

도시를 걷는 여자

‘플라뇌즈(Flaneuse)’는 꽤 오랜 시간 나를 사로잡은 단어다. ‘산책자’, ‘산보자’로 번역하는 벤야민의 ‘플라뇌르(flâneur)’는 모더니즘으로 가득 찬 도시를 호기심에 따라 목적 없이 걸으며 철학적이고 진보적으로 사유하는 사람을 뜻한다. 파리의 아케이드에 벤야민이 있었다면, 경성역에는 구보 씨가 있었다. 이들은 대도시의 스펙터클한 풍광에서 영화와 연극과 문학과 미술과 음악에 관한 비평을 건져 올렸다. 하지만 지난 한 세기 동안 산책은 남성 지식인의 전유물처럼 여겨져왔다.

로런 엘킨의 『도시를 걷는 여자들』은 리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에서 더 나아가 ‘도시를 걸었던 여자들’을 호명해 여성의 문화사와 지성사를 끄집어낸다. 그리고 도시를 산책하는 여자들에게 ‘플라뇌르’의 여성형 ‘플라뇌즈’라는 이름을 붙인다. 조르주 상드, 버지니아 울프, 진 리스, 소피 칼, 아녜스 바르다… 모두 내가 동경하고 사랑하는 산책하는 여성들이다. (<주간 문학동네>에 연재한 정지돈의 에세이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에서는 서울의 플라뇌즈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이 도시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냐는 질문

며칠 전, 또 한 명의 플라뇌즈를 찾았다. <도시인처럼>은 뉴욕에서 비평가이자 작가로 활동하는 프랜 리보위츠의 강연과 인터뷰, 뉴욕 산책을 담은 7편짜리 다큐멘터리 시리즈다. 뉴욕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마틴 스콜세지가 감독과 인터뷰어로 참여해 예술과 재능, 대중교통, 돈, 담배, 건강, 나이 든다는 것, 취미, 책을 키워드로 뉴요커 프랜의 뉴욕 비평을 담았다.

장담하는데, 내가 작년과 올해 본 것을 통틀어 이렇게 쉴 새 없이 웃긴 넷플릭스 시리즈는 <도시인처럼>이 유일할 것이다. 아마도 사르캐즘의 신이 있다면 바로 프랜일 것이다! (마틴 스콜세지도 프랜이 내뱉는 모든 문장에 열광하며 웃는다. 이 시리즈를 끝까지 보게 만드는 최고의 사운드 이펙트라고 생각한다.) 70년대에 뉴욕에 이주해 정착하면서부터 오직 자신만의 힘으로 독립한 프랜, 퀸즈 뮤지엄의 뉴욕 미니어처 사이를 걷는 프랜, 토니 모리슨과 대담하는 프랜, 스파이크 리와 논쟁을 벌이는 프랜, 만 권이 넘는 책을 위해 예산보다 세 배 비싼 집을 산 프랜, 그리고 그랜드 센트럴 역의 불을 끄는 프랜까지. <도시인처럼>의 장면을 따라 뉴욕을 걸으면서 재즈를 듣고, 작품에 삽입된 고전 영화를 둘러보고, 시니컬한 자세로 도시를 도시답지 않게 만드는 모든 것들에 관해 신랄한 비평을 늘어놓고, 호기심과 우정과 활기로 넘실대던 뉴욕을 추억하고, 예술의 태도를 논하다 보면 뉴욕이 한 걸음 가깝게 느껴진다. 그리고 아직도 거세게 나를 흔드는 프랜 리보위츠의 한 마디. “세상에 뭔가 보이려고 한다면 의무감이 있어야 해요”

그런데, 아직 나는 뉴욕에 가본 적이 없다. 뉴욕에 가기로 마음먹은 순간 트럼프가 당선됐다. 뉴욕행을 미뤘다. 다시 뉴욕에 가기로 결심했을 때, 전염병이 전 세계를 강타했다. 이 시리즈를 온전히 이해하기엔 나에게는 뉴욕이라는 감각이 몹시 부족한 것이다. 나 역시 프랜처럼 정처 없이 서울을 걸으며 혀를 끌끌 차기도 하고 값진 무언가를 발견하기도 하는 ‘도시를 걷는 여자’다. 너도 나도 앞다퉈 서울을 못생기게 만들려는 태도에 불만이 너무 많지만, (불평은 나의 힘!) 사랑하게 된 것도 너무 많아서 툴툴대며 서울에 산다. 아마도 계속해서 서울에 살 것이다. 아무튼 오늘도 이 도시에서 씩씩하게 살아남아야지. 그럼, 내가 어딜 가겠어? 부디 올해는 뉴욕으로 떠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꼭 보고 싶은 사람이 생겼으니까.

<나의 문어 선생님>(2020)
My Octopus Teacher
OTT Netflix, 다큐멘터리
감독
 피파 얼릭, 제임스 리드
주연 크레이그 포스터
시놉시스
몸도 마음도 무너져버린 영화감독. 어린 시절을 보낸 바다로 돌아온 그가 신비한 만남을 경험한다. 해초 숲을 헤엄치는 새로운 친구는 그의 삶에 어떤 변화를 선사할까?
<도시인처럼>(2020)
Pretend It’s a City
OTT Netflix, 다큐멘터리
감독
 마틴 스콜세지
주연 프랜 리보위츠
시놉시스
가고 싶은 데가 있었다면 벌써 떠났겠지. 뉴욕을 누비는 프랜 리보위츠. 하지만 그녀는 뉴욕에 불만도 많다. 길을 걸으며 문자를 보내다니! 타임스스퀘어는 세계 최악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