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shmans, Long Season(1996)

전에 ‘노래란 기차가 한 역에서 다음 역에 도착할 때까지 그 위에 작은 건축물이 하나 세워지는 것. 음반이란 열차가 위 과정을 하나하나 거쳐 순환선을 모두 돌고 그 위에 도시가 생겨있는 것.’이라는 문장을 SNS에 남긴 적 있다. 음악이 시간과 공간의 예술임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이를 기차로 비유한 건 음반을 가장 많이 들었던 시기, 가장 많이 들었던 장소가 기차, 정확히는 지하철 안이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때 지하철 8호선이 개통됐다. 잠실에서 모란까지 이어지는 노선이다. 내게는 그렇게 가고 싶었던 홍대와 내가 사는 성남 사이에 포털이 생긴 것 같은 경험이었다. 8호선을 타고 잠실에서 2호선으로 갈아탄 후 한참을 지나 홍대 입구, 또는 신촌역에서 내렸다. 처음 내린 신촌역은 사람이 너무 많아 놀랐다. 그렇게 매주 수많은 서울 사람 사이 촌스러운 성남 청소년이 함께하는 풍경이 만들어졌다. 라이브 클럽에 가서 공연을 보거나 영상 음악감상실에서 종일 뿌연 VHS 화면의 뮤직비디오를 봤다. PC통신에서만 알던 사람과 처음으로 만나기도 했다. 그것만으로도 이 먼 곳에 매주 올 이유는 충분했다.

무엇보다 이곳에 온 가장 큰 이유는 성남에서는 구할 수 없는 수입 음반을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겠지만 예전에는 원하는 음악이 담긴 음반을 찾아 돈을 내고 사기 전엔 들을 수 없었다. 매주 레코드점에 들러 잡지에서 본 음반을 찾고, 작은 정보를 모아, 커버가 마음에 들어 또는 사장님의 추천에 의존해 일반 음반보다 적게는 1.5배에서 많게는 3배가량 비싼 수입 음반을 샀다. 용돈과 ‘삥땅’ 친 급식비가 고스란히 레코드점에 바쳐졌다. 수입 음반은 쉽게 수입 음반임을 구분할 수 있게 상단에 하얀색 라벨이 있었다. 혹시나 그 부분이 찢어지지 않나 조심하며 포장을 뜯고 휴대용 CDP에 넣어 시간을 접어 공간을 이동하는 포털이 아닌, 정직하게 시간을 따라 흐르는 지하철에서 들었다. 홍대에서 잠실, 잠실에서 신흥. 한 장에서 두 장의 음반을 듣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음악을 들으며 부클릿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역시 같은 음반이라도 수입 음반의 인쇄가 더 좋다며 사대주의적 사고를 거침없이 드러내는 동안 음반도 내 일주일의 사이클도 한 바퀴 돌아가 있었다.

그렇게 매주 신촌과 홍대를 드나들다 어느 날 전설의 음반을 발견하게 된다. 당시 월드팝스라는 잡지에 지금은 MPMG 그룹의 대표로 있는 이종현 씨가 칼럼니스트로 일본 음악을 소개하곤 했다. 그중 나와 PC통신 음악 마니아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끈 건 피쉬만즈라는 밴드였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피쉬만즈는 일본 음악 신을 뒤 흔들어 놓은 전설의 밴드며 특히 30분이 넘는 대곡 ‘Long Season’은 전율이 일 정도로 명곡이었다. 하지만 당시 한국은 놀랍게도 일본 음반이 발매되지 않는 나라였다. 근데 레코드점을 뒤지던 내 눈앞에 바로 그 곡이 담긴 앨범 <Long Season>이 놓여 있는 것이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음반을 계산대에 올려놨다. 일본 음반은 다른 나라 수입 음반보다 비쌌기 때문에 돈이 모자랐다. 다행히 이 여정을 늘 함께하던 친구에게 돈을 빌려 살 수 있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 시디를 뜯고 들으려는 순간 역시 이 음반의 전설을 알고 있던, 내게 돈을 빌려준 친구의 부러워하는 눈빛이 눈앞에 스쳤다. 이어폰 양쪽을 나눠 들을 수도 있었지만 음악의 ‘공간’을 포기하기 싫어 처음 음악을 들을 때는 무조건 양쪽 이어폰을 모두 사용해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 양쪽 이어폰을 그 친구에게 쥐여줬다. 네 덕분에 이 음반을 샀으니 네가 먼저 들으라고. 친구에게 시디플레이어를 맡기고 나는 하염없이 지하철 밖으로 변하는 풍경을 보며 덜컹거리는 지하철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늘 음악을 듣느라 제대로 느끼지 못했던 이 풍경과 시간이야말로 ‘Long Season’이라는 음악 그 자체가 아닐까 생각했다. “와 진짜 죽인다.” 곡을 다 들은 친구가 이어폰을 넘겨졌다. 그리고 들은 ‘Long Season’에는 원곡에는 담기지 않은 30분이 조금 넘는 풍경과 시간이 인트로로 함께 담겨 있었다. ‘Long Season’은 그 풍경과 시간이 잘 어울리는 곡이었다. 그리고 친구의 말처럼 와 진짜 죽이는 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