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BO <석세션>(2018~2023)

아비가 누더기를 걸치면 자식들은 눈을 감지만, 아비가 돈 주머닐 갖고 있으면 자식들은 친절하다오.*

HBO 시리즈 <석세션>은 글로벌 미디어 그룹 웨이스타 로이코(Waystar Royco) 창업주 로건 로이의 80세 생일 파티로 문을 연다. 로건의 네 자식들—유일하게 어머니가 다른 코너를 제외하고 특히 켄달, 로만, 시브 세 남매—은 가업 ‘승계(Succession)’ 발표를 기대하며 파티에 참석했다. 과연 누구에게 왕관을 물려줄 것인가? 그러나 영악하고 이기적인 아버지 로건은 틈을 내어주지 않는다. 가능한 한 계속해서 일선에 머무르고 싶어 한다. 그러자 자식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아버지를 끌어 내리기로 한다. 권력 이양 타이밍을 둘러싸고 로이 패밀리는 물밑 작업과 배신, 모욕적 언사를 퍼부어가며 영향력 확보 싸움을 시작한다. 실은 남매들끼리의 비릿하고 음흉한 다툼은 인정투쟁에 가깝다. 더 가지기, 남의 것 빼앗기, 무절제하게 욕망하기 등 숱한 목표 있으나 이들이 공통으로 원하는 것은 아버지로부터의 인정. 이렇듯 웨이스타 왕좌를 차지하기 위한 지지부진한 다툼이 <석세션>의 골자다. 지략과 내공이 부족해 남매끼리 머리채 잡기 일쑤지만. 이 지점에서 <석세션>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어왕』을 꽤 닮아 있다. 다른 점 있다면 심성 곱고 영특한 리어의 셋째 딸 코딜리어가 없다는 것.

상대를 말만으로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저주의 기술을 응축한 걸작들 만날 때 있다. 걸작의 언어는 대부분 중세적이다. 먼저 혀 날름거리는 비난 전문가 셰익스피어. 나는 실성한 리어가 내뱉는 독설을 교본 삼아왔다. MBC 드라마 <욕망의 불꽃>도 참 좋아하는데 극중 인물 남애리 이런 대사를 날린다. “배운 년이 더 쌍스럽다는 거 몰라?” 발산하지 못하는 나라서 이 교본도 품고 산다. <석세션>은 여기에 쌍욕까지 더한다. F 워드가 난무하는 사이 은밀하고 화려한 수사학을 뽐내며 말로 칼빵도 놓고 총기 난사도 하고 독약도 탄다. ‘어휴, 가진 놈들이 더 해. 세 치 혀가 저리 추잡해. 천박하고 드러워…’ 근데 보다 보니 작품 속 인간들을 어여삐 여기며 가여워하게 됐다. 심지어는 연기하는 배우 실제로도 잘못되는 거 아닐지 걱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각자 그리스 고전 희비극 스타일 명연기 뽐내서라는 거 모르는 거 아니지만. 아무튼 그렇게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어느새 이 작품을 우러러보게 됐다.

HBO <석세션>(2018~2023)

우리가 태어났을 때 우는 이유는, 바보들로 가득한 커다란 무대에 올랐기 때문이지.**

2023년 5월 말, 기념비적인 작품 <석세션> 시즌 4가 끝나고 수많은 해외 매체가 페어웰 석세션 기사를 쏟아내던 무렵 한 틱톡 영상 목격했다. DJ가 클럽 한가운데에 <석세션> 메인 테마 송 드랍하자마자,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몸을 흔들어 댔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시샘 비스름한 감정 치밀었다. ‘누구는 뭐 춤출 줄 몰라서 안 추나? 못 추는 거지! 나도 나도 징글징글한 드라마 끝나버렸음 선언하며 끈적하게 즐기고 싶다!’ 가족 드라마의 서막을 여는 신경질적인 음악. 파멸과 위협, 음모로 얼룩진 멜로디에 몸을 맡긴 미국인 향한 부러움에 가득 차, 내가 밟고 선 땅 돌아봤다. 앗. 여긴 HBO가 흐르지 않는 땅. <석세션> 시즌 4 수입을 내팽개친 서울, 코리아…

방영을 시작한 2018년부터 온갖 시상식 휩쓸고 모든 화제성 독점한 글로벌 초인기 시리즈 <석세션>은 높은 완성도로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시즌 4를 마지막으로 끝을 선언했다. 그러다 보니 수많은 이들이 밤새도록 사라웃을 이어갔다. 체감 현대 미국인들 미치게 만든 드라마 일단 <왕좌의 게임> 있고, <석세션> 있다… 허나 서울 사는 나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당장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분하다, 괘씸하다, 어떤 OTT 서비스든 상관없다, 마지막 시즌 들여와라 겁박하기 정도. 그때 고개 뻣뻣하게 세우고 말했지. 우리는 <석세션>도 못 보는 우물 안 개구리! 이래 놓고 한국이 어떻게 콘텐츠 강국?

시리즈의 마지막 시즌 방영이 한창이던 2023년 4월 태어나 처음으로 뉴욕, 아메리카 땅 밟았다. 기대가 컸기 때문인지 조금은 시시했다, 왜냐, 나는 지상 위에 선 인간이고 걸출한 작품들의 카메라는 이미 내 아이 레벨 이상의 것을 보여준 바 있다. 뉴욕에선 걸으면 걸을수록 매시간 매분 매초 줌-인 하고 싶은 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지만 여행자의 눈으로는 볼 수 없음이 자명한 감각이 너무 많아 페이드아웃 거듭됐다. 끼니도 걸러가며 문화가 열린다는 건물과 건물을 분주히 뛰댕기다 보니 피곤에 절어 여행이 끝났다. 그치만 솔직히 질투랑 화딱지가 불쑥 치솟았다. 마침맞게 뉴욕은 <석세션>의 내장도 외피도 흐르는 곳, 세계는 내가 상상한 것 그 이상으로 뉴욕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더라. 생각보다 참말로. 뉴욕증권거래소 방문한 날, 그날도 어김없이 시위가 열리고 있었다. 미친 물가의 도시, 그보다 더 미친 팁의 도시에 잠시 머무른다는 이유 단 하나로 내 쪼끄만 자산 잔액이 실시간으로 숭덩 깎여나가는 게 혈관을 타고 느껴졌다. 그땐 진심으로 월가 시위에 합류할 뻔… 아니 합류하고 싶었지만 불운의 추방을 염려한 나는 시위대를 지나치며 그랬지. ‘아참참, 이들이 규탄하는 배부른 자본가, 탐욕에 눈이 멀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더 가지려는 인간들 <석세션>에 한 보따리 나옴, 역시 뉴욕!’

금세 2년이 흘렀다. 버티니 기회는 오더라. 2025년 3월 말, 쿠팡플레이가 HBO 오리지널 콘텐츠 독점 제공을 발표하면서 <석세션> 피날레를 맞이하는 호들갑에 뒤늦게 끼게 됐다. 갈급하게 기다린 사랑이 이런 식으로 신념과 맞물리다니… 무릎은 이럴 때 화끈하게 꿇고 보는 것. 한국과 <석세션>의 만남, 드디어 가까스로 성사됐다.

HBO <석세션>(2018~2023)

자, 감옥으로 가자. 거기서 우리는 단둘이 새장 안에 든 새처럼 노래를 하자.***

아버지 로건 로이의 삶을 살펴보자. 그는 전쟁을 피해 스코틀랜드에서 캐나다로, 성공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 굴지의 미디어 제국을 건설한다. 미국이 ‘천조국’이라는 별칭을 얻는 데 일조한 전 세계 정재계를 쥐락펴락하는 인물로 아주 높은 곳에 우뚝 선 거인이다.

하지만 로건의 형 이완은 그를 이렇게 평한다. “로건이란 사람은 이따금 세상의 경계를 축소했습니다. 때때론 하늘을 조금 어둡게 만들며 사람들의 마음을 닫아버렸죠. 사람들의 어두운 불꽃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차갑고 잔인하며 누그러지지 않는 불꽃. 타인의 마음이 식어갈 때 자신의 마음을 데우며 타인이 굶주릴 때 자신의 곳간을 채우는 불꽃.” 이때, 둘째 아들 켄달은 아버지가 만들어낸 부를 다른 시선으로 회고한다. “돈이란 삶의 혈구처럼 이 나라, 이 세상을 휘감으며 모든 사람을 욕망으로 채웁니다. 야심을 자극하여 소유하고 만들고 거래하고 이윤을 내고 건설하고 발전하게 합니다. 위대한 간헐천 속 아버지가 바란 삶, 아버지가 세운 건물, 강철 선체의 배, 오락, 신문, 공연, 영화. 삶. 피투성이의 복잡한 삶. 아버지는 삶을 만드셨습니다”

<석세션>이 끝난 지 2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뉴스를 틀면 유사 로건 로이들이 지구의 운명을 결정하고 있다. 선택함과 동시에 세계를 환희에도, 절망에도 빠뜨린다. 요즘 들어 미국 아버지들이 생각 없이 누르는 버튼 하나에, 휘갈겨 쓴 SNS 게시글 하나에 멀리 사는 내 생활도 으스러질 수 있음을 부쩍 실감한다. 그럴 때면 세계 질서의 한 축에 편입해 보려 발버둥 치는 한국 땅에서 천조국의 창조자들에게 고함친다. “미국 아버지시여, 어찌하여 이러시나이까!” 째려보며 혼잣말도 한다. ‘아니 근데 자기들 시대가 영원할 거라고 생각하나?’

미국 아버지는 누구로부터 만들어졌고 무엇으로 되어 있으며 어떻게 쇠하고 부활하는가. 아직 로이 가문 대저택 문 열지 않은 이들을 위해 <석세션>이 들이미는 미국 아버지 승계를 탐험하는 열쇠를 여는 몇 가지 힌트 드랍하며 나도 이제 그만 이쯤에서 <석세션>을 보내주려 한다. 하나. 스테파노 마시니 희곡 『리먼 트릴로지』. 1840년대, 독일을 떠난 유대인 리먼 삼 형제 하나둘 뉴욕항에 도착한다. 희곡은 2008년 세계 최대 투자 은행 중 하나였던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하기까지 장구한 리먼 가족사를 살핀다. 160년 간 돈은 만물의 우위를 결정하는 절대 가치로 우뚝 선다. “씨를 뿌리면 거둘 것이다. 그런데 만약 씨 뿌린 밭에 갑자기 화재가 나면?” 둘, 쇼타임 제작 TV 시리즈 <빌리언스 Billions>의 주인공 수십억 달러 규모의 헤지펀드 액스 캐피탈 CEO 보비 액설로드는 9·11 테러 당시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고 동료들이 죽어가는 순간에도 공매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때 벌어들인 돈은 천문학적 부의 씨앗이 됐다. 원죄로 인한 자책은 씻겨나가지 않지만 생존자 액스는 영웅 되기를 자처하고, 이에 맞서 돈으로 법망을 주무르는 부자들을 혐오하는 뉴욕 연방 검사 척 로즈가 액스 뒤를 쫓는다. 셋, 2014년부터 2019년까지 방영한 HBO 시리즈 <실리콘 밸리 Silicon Valley>는 스타트업 ‘피리부는 사나이(Pied Piper)’를 통해 테크 붐의 한복판을 비춘다. 혁신과 속도, 데이터 중심주의의 유혹. 재빠르게 실험하고 날쌔게 실패해 축적한 경험이 로켓 성장을 견인한다는 강인한 복음 전파가 이어지자 현대인 삶의 양태를 바꾼 테크 그루와 벤처캐피탈리스트가 신흥 미국 아버지로 부상해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됐다. 뭐랄까, 미국의 역사가 앞으로 갈 때 화폐의 형태며 재질이 무어든 자본을 더 많이 가진 자가 승리한다고 쉽게 믿는 이들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나, 여기 여전히 오만한 나르시시스트이자 동시에 외로움에 취약한 가부장, 꼭대기에 오른 리어왕들이 굽어보는 세상에 살고 있다. 아아… 오늘도 우리 세계 미국 아버지가 보우하사…

이 글의 소제목은 모두 『리어왕』 대사를 빌렸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영문 원문을 함께 적었다.
* 2막 4장. 광대가 리어에게. “Fathers that wear rags Do make their children blind, But fathers that bear bags Shall see their children kind.”
** 4막 6장. 리어가 글로스터에게. 또는 리어의 독백. “When we are born, we cry that we are come to this great stage of fools.”
*** 5막 3장. 리어가 코딜리어에게. “Come, let’s go to prison. The two of us alone will sing like birds in a cage.”

 <석세션>(2018~2023)
원제 Succession
OTT 쿠팡플레이
크리에이터 제시 암스트롱 외
출연 브라이언 콕스, 제레미 스트롱, 키에런 컬킨, 사라 스누크 외
시놉시스
글로벌 미디어 산업의 성공으로 매우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로이 가문. 하지만 가족 간의 관계는 권력과 후계 서열을 두고 복잡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