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러코스터, [Absolute], 2002

<김동완의 텐텐클럽>과 <태연의 친한친구>, 그리고 <푸른 밤 종현입니다>까지. 라디오 키즈로서 라디오 어덜트가 되기까지 나의 지난 궤적은 큰 범위에서 보자면 케이팝 덕질의 이력을 따라왔다. 지방 행사부터 해외 콘서트까지 활동 반경이 넓고 소화해야 할 스케줄이 많았을 어떤 아이돌 멤버가 매일 두시간씩 주어진 시간을 책임지는 건 국내 라디오계의 유구한 역사였다. 그렇게 아이돌이 가상의 ‘천사’가 아니라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인간’ 이라는 걸, 어쩌면 나는 라디오 부스에 앉아 청취자들의 사연에 공감해주는 완디, 탱디, 쫑디의 목소리를 통해 순차적으로 깨달아갔던 것도 같다.

나는 재미있는 사연을 듣는 걸 좋아하지만 사연을 보내는 유형의 청취자는 아니었다. 내게 벌어진 온갖 일들과 최근의 고민거리를 담은 사연을 쓰려고 하면 언제나 너무 많은 부연 설명이 필요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짧은 문자는 50원, 긴 문자는 100원의 정보 이용료가 드는 문자는 나를 담아내기엔 한없이 모자라게 느껴졌다. 눈 딱 감고 긴 사연을 보낸다고 해도, 광고, 음악, 57분 교통 정보 등으로 빼곡히 채워져 있는 라디오의 세계에서, 시간 관계상 DJ는 사연 전문을 읽어주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이런 내가 처음으로 사연을 보낸 라디오는 갑작스러운 개편으로 채 1년을 못 채우고 종영한 SBS 파워FM <김형중의 뮤직하이>였다. (안정적인 보이스 톤을 가진 김형중 씨는 1994년부터 다수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거쳐 왔다. 심지어 2025년에도 CPBC 가톨릭평화방송에서 라디오를 진행하고 있다.) <김형중의 뮤직하이>에는 익명의 사연자가 모종의 이유로 누군가를 향해 쓰고도 부치지 못한 편지 전문을 DJ가 대신 낭독해주고, 편지 본문에 관한 아무런 코멘트도 없이, 곧장 신청곡을 틀어주는 멋진 코너가 있었다. 김형중 씨의 목소리에는 본문 내용에 대한 가치 판단이 없어서 듣는 입장에서는 어쩐지 매번 안심이 되었다. 언젠가 분량에 구애받지 않은 채로 기나긴 무언가를 써서 보고 싶다는 마음이 점점 차올랐다.

2년 반을 사귀고도 나를 버디버디에서 차버린 전 연인을 향해 쓴 편지가 약 7분에 걸쳐 읽혔던 날을 기억한다. 나는 김형중 DJ가 “사연자 분의 상실감이 크시겠고… 전 연인분이 성의가 부족하시지만… 그나저나 버디버디? 귀엽습니다…” 라는 말을 덧붙이지 않을 것을 알았다. 내가 사연과 함께 고른 신청곡은 롤러코스터의 ‘Last Scene’이었다. 그 곡이 라디오에 흐르는 동안 이런 생각을 했다. 파국에 다다른 관계란 누군가에게는 예정된 미래일 뿐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럴만한 이유를 짐작할 전조 없이 벌어지는 사건이라고. 아무나, 그 전조가 무엇이었는지를 상대에게 물어볼 수는 없는 것이라고.

‘Last Scene’의 화자는 적어도 오프라인으로 손절 당한듯 하다. 네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헤아릴 수 있을 때까지그 자리에 그냥 서 있다고 노래하는 걸 보면. 그는 어디서 차였을까? 유동 인구가 많은 거리였을까? 단골 카페였을까? 이 노래의 제목처럼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는 건 모든 이별인간들에게 주어지는 기회가 아니었다. 이건 관계의 끝을 놓고 대면해서 상호 합의를 거친 이들을 향한 일종의 특권이었다. 온라인 이별을 겪은 그때 나에게는 되돌아볼 마지막 순간이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부재에는 지나간 관계를 처음부터 끝까지 헤집어 좋았던 나날들까지 의심하게 만드는 역효과가 있었다. “다행히도 시간은 흐르고여전히 나는 인간 관계를 잘 굴리는 법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나를 알고 지내는 모든 이들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 언젠가 우리가 다른 길을 가야만 한다면 서로에게 분명한마지막 장면을 남겨주는 일에 소홀해지지 않을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