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다드 카페] OST, 1988
난 운명론을 믿지 않는다. 인생의 곡을 만나게 된 과정만 빼고 말이다. 이건 운명이라는 단어 외 설명할 길이 없다. 시작은 중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1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뉴키즈 온 더 블록(New Kids On The Block), 보이즈 투 맨(Boyz II Men), 스눕 도기 독(Snoop Doggy Dogg) 등의 음악에 빠져있던 당시, 영화 [가위손]을 보고 영화음악에도 관심이 생겼다. 하지만 그때는 한국에서 정식 발매되지 않는 사운드트랙이 수두룩했다. 며칠간 모은 용돈을 들고 동네 음반숍에 갔다가 허탕을 치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몇 달 뒤 영화 잡지 [스크린]에서 눈에 띄는 광고를 봤다. ‘영화음악 전문매장, 수입 음반 다수 보유’.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위치는 혜화동이었다. 잔뜩 흥분된 맘으로 전화를 걸어 [가위손] OST가 있다는 답을 듣고 그 주 토요일, 안산에서 4호선 지하철을 타고 혜화로 갔다. 매장이 있는 건물에 들어섰을 때의 광경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하 1층으로 이어진 나선형 계단에는 레드 카펫이 깔려 있었다. 벽을 차지한 건 영화 포스터로 만든 액자들이었다. 숍에서는 그윽한 커피향을 타고 신비한 분위기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비현실적이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잠깐 들은 제목 모를 그 음악이 귓가에 맴돌기 시작했다. 혹시나 라디오에서 나올까 싶어 기회가 될 때마다 ‘배철수의 음악캠프’와 ‘채시라의 영화음악실’을 들었다. 언제든 녹음할 준비를 마친 채로. 하지만 버튼을 누를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그날의 신비롭던 음악은 점점 기억에서 희미해졌다.

#2

시간이 흘러 대학 입학을 앞둔 어느 날, 난생처음 소개팅이란 걸 했다. 친한 고등학교 동창이 주선한 자리였다. 카페에서 만나 어색한 첫인사를 나누고 (아마도) 서로의 취미 같은 걸 묻는 순간이었다.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그 노래다.

“어, 이 노래……”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더 큰 문제는 상대가 이야기를 건네는 상황이었다는 것. 갑작스레 끊긴 대화에 상대는 살짝 당황한 듯한 기색을 보이더니 물었다.
“아…… 좋아하는 노래세요?”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얼굴도 화끈거렸다. 이런 무례를 범하다니……
“죄송해요. 제가 잠깐 미쳤었나 봐요.”
상대는 괜찮다며 웃음지었지만, 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 소개팅은 쫑났다는 것을.

그날 저녁 동창에게 전화가 왔다.
“야, 만난지 20분도 안 돼서 정신 팔았다며?”
“그것밖에 안 됐었나? 내가 왜 그랬지? 그분 예뻤는데……”
“그러게, 왜 그랬니?”

그때 난 “소개팅이 처음이라 그래”라는 궁색한 변명으로 마무리했고, 그 음악의 제목도 알아내지 못했다.

#3

그로부터 얼마 후 대학에 들어갔다. 비극적인(?) 첫 소개팅을 겪은 나는 운 좋게도 입학 한 달여 만에 캠퍼스 커플이 됐다. 그렇게 학과 1호 커플로서 1년 반을 지냈을 무렵이다. 입영통지서가 날아왔다. 여자친구에게 바로 말해야 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군대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과 연인이 떠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마구 뒤섞였다. 그렇게 입대 두 달 전까지도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어느 날 답답한 마음에 동기와 술을 마시며 상황을 털어놓았다. 예상한 반응이 나왔다.
“야 이 미친놈아, 그걸 아직도 말 안 했다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풀려 있던 녀석의 눈이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어진 진지한 충고.
“지금이라도 빨리 말해라. 그러다가 입대 전에 차인다.”
그렇지 않아도 이젠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취기도 용기를 북돋아줬다.

술자리를 파하자마자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집 근처로 가겠다고 했다.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은 여자친구는 한달음에 달려 나왔다. 얼굴엔 기분 좋은 웃음이 번졌다.
“오늘은 OO랑 한 잔하고 그냥 집에 간다며?”
“어, 마셨지. 그런데……”
오늘은 꼭 말할 참이었다. 그러나 또다시 하지 못했다. 결국 입에서 흘러나온 건 보고 싶어서 왔다는 한마디. 우린 잠깐의 수다와 긴 포옹을 하고 돌아섰다.

그날 집으로 가는 막차 버스 안에서 금방이라도 흘러나올 것 같은 눈물을 참고 또 참았다. ‘내일은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때 라디오에서 거짓말처럼 그 노래가 나왔다. 처음 들었을 때의 신비로운 분위기 그대로였다. 게다가 음악이 끝나자 디제이가 제목까지 말해줬다.
“제베타 스틸(Jevetta Steele)의 ‘Calling You’ 들으셨습니다. 영화 ‘바그다드 카페’ 수록곡이죠.”.
순간 여러 감정이 복받쳤다. 몇 년에 걸쳐 무려 세 번이나 우연히 마주쳤다는 신기함, 드디어 곡의 제목을 알게 되었다는 기쁨, 복잡하고 두려운 맘을 위로받았다는 느낌. 그렇게 ‘Calling You’는 인생의 곡이 되었다.

단지 곡과의 운명적인(?) 만남 때문만이 아니다. 음악적으로도 완벽하다. 제베타 스틸은 사막의 끝 어딘가에서 한 손을 뻗어오는 듯한 음성으로 고통과 희망을 동시에 노래한다. 그녀의 보컬은 고요히 스며들어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작은 온기를 일깨운다. ‘Calling You’는 잃어버린 길 위에 서 있는 이들에게 아직 끝나지 않은 여정을 가리키는 나침반과도 같은 곡이다. 어떻게 이런 무드와 보컬, 그리고 멜로디가 나올 수 있었을까. 들을 때마다 놀랍고 가슴 벅차다. 요즘도 이 곡을 듣다 보면 어느 순간 첫날의 광경이 펼쳐진다. 지하로 이어진 나선형 계단에는 레드 카펫이 깔려 있다. 그리고 그윽한 커피향과 신비로운 분위기의 음악이 피어 올라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