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 잠시나마 히피였던 때가 있잖아요
철학과는 별나다는 속설을 나도 믿었다. 들어가기 전까진. 허나 신입생 환영회는 지나치게 차분했다. 교수님들은 좋은 말씀, 선배들은 운동 가요, 동기들은 진지한 각오를 늘어놓으며 겉돌았다. 축 처진 분위기 속에서 과대표가 간청했다. “선생님들도 한 곡 뽑아주시죠.”
뜻밖에 점잖아 보이는 동양철학 교수님이 일어나셨다. 그러곤 번개 같은 첫 소절로 졸던 나를 번쩍 깨웠다. 이게 뭔 노래야? 까랑까랑한 성조의 중국어 같은데, 창인 듯 시조인 듯…. 교수님이 소절마다 번역을 더해줘 알았다. 조조가 적벽대전을 앞둔 연회에서 읊은 ‘단가행’이었다. 뭐야? 멋있잖아.
“답가해야지, 답가.” 선배들의 시선이 신입생들 쪽으로 돌아왔고, 내가 벌떡 일어났다. ‘질 수 없지. 교수님들이 상상 못할 노래를 불러드려야겠군.’ 그러곤 샤우팅. ‘어둡고 탁한~’ 티삼스의 ‘매일매일 기다려’를 때려 주었다.
고향의 몇 안 되는 친구들은 서울로 가는 나를 걱정했다. “니는 말도 없어서 친구나 사귀겠나?” 하지만 그 한 곡으로 나의 교우 관계는 편안히 해결되었다. 반짝거리는 안테나를 가진 녀석들이 자석처럼 몰려왔고, 눈을 떠보니 나는 축제날에 수업을 빼먹고 잔디밭에서 들국화의 전곡을 이어 부르고 있었다.
“우리 춘천 갈래?” A였다. 강의실에선 거의 보지 못했던 녀석이 어느새 옆에 와 있었다. 이유를 묻거나, 방법을 고민하거나, 빠질 핑계를 대면 지는 게임이었다. 곧바로 기차를 탔다. 호수에서 배를 탔는지, 막국수를 먹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저녁이 되자 모두의 주머니를 털어 돈을 모았다. A가 말했다. “이걸로 집에 갈래? 아니면 술 마시고 내일 갈래? 잘 데는 내가 책임질게.”
A는 술에 취한 우리를 데리고 어두운 골목을 더듬어 ‘아는 분’의 집으로 갔다. 주인은 소설가 이외수 씨였다. ‘아는 분’은 맞는데, A가 일방적으로 아는 사이 같았다. 다만 이런 민폐가 처음은 아니었다. A가 고등학교 때 시를 쓰며 방황할 때, 무작정 춘천으로 와서 전화번호부에서 그의 번호를 찾아 돌렸다고 한다.
이외수 씨는 술병으로 누워 있었고, 사모님이 철없는 식객들을 감사히 받아주셨다. 늘 있는 일이라는 듯. 좁은 방에 누워 우리는 또 음악 이야기를 했다. “들국화의 ‘머리에 꽃을’이 뭘 말하는지 알아?” 서울 녀석들이 우드스톡과 ‘사랑의 여름’에 대해 떠들었고, 나는 조용히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떠나려는 우리를 이외수 씨가 붙잡더니 저녁까지 또 떠들었다. “김일성에게 대마초를 주라고. 그럼 세계 평화가 올 거야.” 그런 실없는 소리를 했다.
A가 시인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대학을 나와 만화 비평가가 되었고 언더그라운드 만화가 로버트 크럼을 통해 1960년대 히피들의 시대를 탐험했다. 그는 자비 출판한 만화를 샌프란시스코 거리에서 팔았고, 히피들과 록밴드의 열광적인 사랑을 받았다. 나는 그가 앨범 표지를 그린 빅 브라더 앤드 더 홀딩 컴퍼니(Big Brother and the Holding Company)를 통해 재니스 조플린을 만났다.
시간은 무상히 흘렀다. 내 목소리는 해마다 반 키씩 떨어져, 티삼스는커녕 어떤 곡도 두세 키를 내리지 않으면 완창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대신 몸으로 음악을 즐기는 법을 배워 스윙 댄스와 블루스 댄스에 빠졌고, 이제는 오래된 노래들을 캐내 댄스 파티에서 트는 디제이를 하고 있다.
댄스 페스티벌을 가다 샌프란시스코에 들른 나는, 당연하게도 크럼이 만화책을 팔던 하이트–애쉬베리 거리로 갔다. 득실거리는 관광객들이 지나간 길가엔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죽음을 기리는 꽃들이 놓여 있었다. 나는 와인하우스의 ‘러브 이즈 어 루징 게임’을 흥얼거리다, 조플린의 ‘서머타임’을 부르다, 조금 부끄럽지만 ‘매일매일 기다려’를 무성의 샤우팅으로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