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지지 않는 불빛
2010년 겨울, 극장에서 <500일의 썸머>를 봤다. 두 남녀가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무릎을 쳤다. 승강기 안에서 남자가 헤드셋을 끼고 더 스미스(The Smiths)의 「꺼지지 않는 불빛이 있다(There is a light that never goes out)」를 듣고 있다. 동승한 여자가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두 사람의 사랑이 시작된다. 순간 시간의 문이 열리며 J가 다가왔다.
2000년 여름, 나는 n년차 런던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 준비를 하던 차에 J를 만났다. 우리는 갑자기 친해져 한 달간 런던을 쏘다니며 많은 얘기를 나눴다. 영국 북부 요크(York) 출신의 J는 성 소수자였다. 당시 50대였고 극도로 내향적인 성격에 생애 단 한번의 연애를 끝으로 중세 수도승처럼 외롭고 미니멀하게 살고 있었다. ‘아싸’ 중에서도 ‘핵아싸’였다.
어느 날 J는 카세트테이프에 자신이 좋아하는 밴드의 노래를 녹음해 선물로 주었다. 그렇게 해서 더 스미스를 만났다. 80년대 초반 맨체스터에서 결성해 5년 남짓 활동하고 해체한 모던록의 아이콘격인 밴드였다. 당시 영국은 오아시스와 블러, 라디오헤드가 군웅할거하고 펄프, 버브, 트래비스, 뮤즈가 부상해 춘추전국 시대를 방불케 했던 브릿팝의 전성기였다. 나는 신곡은 안 듣고 6, 70년대 프로그레시브 록과 80년대 모던록만 듣는 J의 음악 취향이 편협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더 스미스의 음악을 접하자 내 귀에 신세계가 펼쳐졌다. 찰랑거리는 조니 마(Johnny Marr)의 경쾌한 기타 리프와 보컬 모리씨(Morrissey)가 쏟아낸 중2병 환자 같은 찌질한 노랫말은 정반합의 시너지 효과를 내며 단번에 나를 매료 시켰다. 그중 J가 제일 좋아하는 「There is a light that never goes out」은 가출 소년의 넋두리다. “2층 버스가 우리를 덮쳐도/ 네 곁에서 죽는 게 황홀하게 죽는 방법이야”란 가사는 웃프면서도 처절했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성 정체성 때문에 가족과 불화를 빚었던 J의 개인사가 더 스미스 노랫말에 담겨 있다는 사실을. 밴드의 간판 스타격인 모리씨 역시 성 소수자였다. 밴드가 해체됐어도 J가 왜 고집스럽게 더 스미스를 추앙했는지 이해가 됐다. 그 시절 더 스미스의 음악은 브릿팝 밴드들의 교과서였다.
밴드에서 노랫말을 전담했던 모리씨는 문학적 감성이 풍부한 작사가로 정평이 나 있었다. J는 더 스미스 가사에 담긴 오스카 와일드, 예이츠, 키츠의 시를 들려줬다. 불행히도 그가 읊어준 영시(英詩)의 세계는 내 지적 영역을 한참 벗어나 언어의 장벽만 실감했지만.
런던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나는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키우며 바쁜 나날들을 보냈다. J와는 이메일과 편지로만 연락을 주고받았다. J는 곤궁한 형편에도 20년 넘게 한 해도 빠짐없이 내게 성탄 선물과 영국 풍경이 담긴 달력을 보냈다. 나는 J 덕분에 알게 된 더 스미스의 음악을 들으며 밴드 멤버들의 근황을 꾸준히 접하며 팬심을 이어갔다.
2012년 봄, 솔로 가수로 활동하던 모리씨가 내한 공연을 했다. 나도 공연장에 가서 여전히 미성을 간직한 모리씨의 라이브를 보며 열광했다. 아쉽게도 모리씨는 더 스미스의 재결성은커녕 밴드 해체 이후 나머지 멤버들과 줄곧 불화 모드였고 팬들을 위한 재결합 공연조차 거부해 왔다. 더군다나 모리씨는 밴드 시절부터 국수주의자의 면모를 드러냈는데 브렉시트 찬반 논쟁 때 본색을 드러냈다. 대부분 반대파였던 동료 영국 뮤지션들과 달리 브렉시트를 적극 찬성해 빈축을 샀다.
2022년 여름, 딸들과 영국 여행을 했다. 요크에 살고 있던 J도 나를 보기 위해 비싸기로 악명높은 영국 기차 요금을 감내하며 런던까지 달려와 주었다. 우리는 22년만에 재회를 했다. 세월이 흘러 J도 이젠 70대가 됐고 연금에 기대 근근이 생활하고 있다.
몇 시간의 짧은 만남 끝에 아쉬운 작별을 하며 J는 내게 말했다. 자신의 일생에서 꺼지지 않은 불빛이 있다면 그건 나와의 우정이었다고. 2000년 여름은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날들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