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잔해가 묻어 비애로 가득 찬 텅 빈 우주
마음이 고요하지 못해 소파에 널브러져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토요일 오후. 무심히 핸드폰에서 코로나 팬데믹을 견디고 돌아온 ‘상상마당 시네마’와 마주쳤다. 개봉하자마자 달려가겠노라고 생각했던 영화 <본즈 앤 올>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방금까지 아무 것도 할 게 없었던 주말 오후는 갑작스레 소란해졌다. 게으른 자의 즉흥 예매는 20분 후 상영이라는 ‘좁은 문’을 통과해야 했다.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시간, 하필이라고 묻고 싶은 기분. 나는 부리나케 택시를 부르고, 감지 않은 머리에 초록색 캡을 눌러썼다.
영화관을 가는 길, 그 짧은 시간 나는 택시 안에서 급한 마음에 헐떡이며 피가 도는 나의 피부와 심장의 소리를 느끼고자 잠시 눈을 감았다. 나의 뛰는 심장 소리가 택시의 엔진이 만들어낸 소음을 삼켜버릴 것 같았다. 마음을 진정시키고자 이어폰으로 그 심장소리를 막아버리고 스피리츄얼라이즈드(spiritualized)의 ‘Ladies and Gentlemen We Are Floating in Space’를 들었다. 평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르는 슈게이징이다. 슈게이징(Shoegazing), 1980년대 영국에서 시작된 이 몽환적인 록 음악은 신발을 바라보며 연주한다는 뜻으로 사이키델릭하고 내밀하고 폐쇄적이며 나만의 세계를 외롭게 호소하는 인디 록을 가리킨다. 몽환적인 사운드는 드림팝을 연상시키지만, 사운드에 변형과 왜곡을 안겨주는 디스토션(Distortion)이 더해진다. 몽롱한 멜로디의 질감을 가진 속삭이는 목소리 같은 이 장르는 마음이 혼란한 날, 나른하고 목적성 없이 떠도는 눈동자의 흔들림을 붙잡기 가장 잘 어울리는 음악이다. 1980년대 중반 음악계를 샤우팅했던 ‘헤비메탈’ 같은 장대한 콘셉트를 앞세운 클래식 록(Classic Rock)의 ‘대안’으로 시작된 얼터너티브 록(Alternative Rock)의 하위 장르로 여겨지는 슈게이징은 나를 평생토록 이 장르의 깊은 구렁텅이 속에 빠트려 헤어나오지 못하게 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 중에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 바로 ‘Ladies and Gentlemen We Are Floating in Space’인데, 이는 영국의 슈게이징 밴드 스피리츄얼라이즈드(spiritualized)의 정규 3집에 수록된 곡이다. 팀의 리더이자 프론트맨인 제이슨 피어스는 3집에 대해 ‘구원이란 없고, 사람의 삶에는 절대 끝나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다’라고 이야기했다. 스피리츄얼라이즈드는 언제나 마약과 섹스에 빠진 황홀경을 표현하고자 했던 밴드였다. 하지만 제이슨이 이별한 직 후 커다란 공허함과 상실감을 가진 채 만든 이 앨범은 그의 사랑의 잔해가 묻어 비애로 가득 찬 텅 빈 우주를 떠돌고 있다. 이 앨범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약에 취한 듯 1번 트랙 ‘Ladies and Gentlemen We Are Floating in Space’부터 12번 트랙 ‘Cop Shoot Cop…’이 전부 흐를 때까지 멍하니 한자리에 앉아 있었다. 앨범의 커버에는 6개의 알약이 놓여져 있는데 커버에 적힌 주의사항처럼 독한 약에 취하듯 이 앨범에 빠져들지 않기란 쉽지 않다.
우주에 잠식된 듯 잠시 차원을 벗어났던 시간이 끝났다. 영화 시작 5분 전, 불은 꺼져 있었지만 영화는 아직이었다. 다섯 명 남짓한 관객이 드문드문 앉아 있는 컴컴한 극장 사이로 더듬더듬 자리를 찾았다. 송골송골 맺힌 땀도 스르르 숨어들었다.
영화감독 루카 구아다니노의 작품을 좋아한다. 그를 처음 만난 영화 <아이 엠 러브>와 그를 스타덤으로 올린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그리고 <비거 스플래쉬>와 <서스페리아>를 사랑한다. 첫사랑의 정의가 세상에서 처음으로 깨달은 ‘새로운’ 사랑이라면 그는 이 처음을 가장 아름답게 그려내는 사람 중 한 명일 것이다. 또한 사회적 소수자와 정치적 피해자를 위한 핏빛 그림을 그리는 정치적 올바름도 그의 영화를 여러 번 다시 보게 만드는 결정적 이유다.
<본즈 앤 올>은 전자와 후자가 만나 잉태된 사랑의 결실 같다. 주어진 뒤틀린 세계 속에서 소수자, 아니, 괴물이 되어버린 소녀와 소년. 사람을 먹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기괴한 이터(EATER)로 태어난 그들의 이야기는 카니발리즘(Cannibalism)을 소재로 한 단순한 공포가 아니다. 소녀 매런과 소년 리는 소외받고 핍박받고 가족으로부터 버림받는 존재였다. 하지만 서로를 만나 낭만적 사랑을 하고, 악몽 같은 괴로움에 시달리고, 사랑에 투신한다. 비극적인 운명 속 존재들은 절대적 고독 속에서 자신을 이해해 줄 누군가를 간절히 원하고 바란다. 서로의 앞에 같은 형질과 물성을 가진 매런과 리의 사랑은 절대적 자기혐오 속에서 겨우 발견한 이타적이자 나르시시스적 사랑이다.
아무리 사랑해도 끝내 찾아오는 고독한 순간. 어떤 관계로 이어져도 서로가 서로를 전적으로 이해하고 이해받는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손바닥에 따뜻하게 담은 상앗빛 보드라운 병아리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어가는 모습을 목도하며 아무리 노력해도 붙잡을 수 없는 게 있다는 세상의 섭리를 오래전에 깨달은 이는 비단 나만은 아닐 것이다.
온전히 하나가 되고 완벽하게 이해받는 사랑은 불가능할까? 아니, 애당초 사랑이 존재할까? 내가 처음 사랑이란 것을 깨달았을 때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은 이해에 가까웠을까, 욕망이었을까, 혹은 내 것이 생긴 소유의 갈망이었을까. 내가 애정하는 것들에게 주는 이 마음이 정확하게 어떤 형태인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타인이 당신이 되고 무용하던 것이 애정 어린 필요가 되는 기적을 수없이 경험했기에, 완벽한 사랑이 존재한다는 기대를 놓치기 어렵다.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의 최상급은 무엇인가, 하는 궁금증이 불현듯 날 선 바람처럼 마음을 스친다. 영화 속 매런과 리가 제시한 기괴하고도 완벽한 사랑의 결말은 나를 끊임없이 다른 세상 속으로 이끌었다. 마치 ‘Ladies and Gentlemen We Are Floating in Space’ 속 두 사람 마냥 우주에 떠 있는 것처럼 마음을 고독하게 만들었다. 사랑하는 이와 이별했지만 영원한 존속을 맞이한 소년 소녀가 세상에서 더 이상 외로움에 전복되지 않기를, 자책하고 자학하지 않기를 바라며, 나는 다시금 스피리츄얼라이즈드의 앨범을 반복해서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