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트 도터>(2021)

이해하기 힘든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할 때의 쾌감이 있다. 그가 처한 상황을 참작해 보거나 특정한 사건으로 치명타를 입은 인물의 돌발적인 반응이리라 곡진하게 해석하려는 노력으로도 끝내 납득하기는 어렵고 버거운 캐릭터들. 애당초 쉽게 공명할 수 없도록 설계된 캐릭터 특유의 고약한 면모를 맞닥뜨리게 되면 순간 몰입이 깨지고 어쩐지 이전보다 더 차가운 시선으로 관망하게 된다. 그래도 한번은 저 인물이 왜 저러는지 구구절절까진 아니어도 근거가 될 만한 에피소드가 나오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면서. 그러나 어떤 캐릭터는 끝끝내 보는 이들을 배반한 채로 이야기를 닫는다. 관객을 차갑게 지켜보는 자의 자리에서 좀체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 채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생각에 잠긴다. 이 영화를 좋아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이렇게도 치환된다. 내가 이 인물을 변호할 수 있을까?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한참 캐릭터에 관한 판단을 유보해가며 혐의가 짙은 몇 장면들을 곱씹고 있다면 그 영화는 좋은 영화일까? 일단 그 서사를 매력적으로 느낀 것만은 분명하다.

<로스트 도터>의 레다 역시 마냥 믿고 따라갈 수만은 없는 캐릭터다. 그리스로 홀로 바캉스를 온 그는 쉬는 동안 틈틈이 그간 밀린 책을 읽거나 연구 자료를 살필 예정이었으나, 그 계획은 어느 날 잠잠한 바다를 가로지르며 당도한 보트에서 내린 대가족의 계속되는 소란으로 이내 틀어지고 만다. 뉴욕 퀸스에 거처를 두고 있다는 그리스계 가족은 매년 바캉스 시즌마다 이 섬에서 여름을 난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주인의식이 다분한 가족들은 먼저 와 있던 레다를 되레 이방인 취급하며 자신의 편의를 위해 선베드 위치를 옮겨줄 수 있는지 묻는다. 동반인 없이 혼자인 레다가 선뜻 자리를 옮겨줘야 한다는 듯이. 그러나 레다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미소를 지으면서도 단호하게 거절하는 그를 가족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가족끼리 같이 있겠다는데 자리 하나 바꿔주는 게 그렇게도 어렵냐는 투정 섞인 핀잔에도 레다는 무감하게 반응한다. 한동안 매일 이 해변에서 마주치게 될 사람들이었으니 괜히 얼굴 붉힐 일은 만들지 않는 게 낫지 싶어 불편을 감수할 수도 있었지만, 레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레다에게 시끄럽고 무례한 존재로 감지되었고, 그런 존재라면 가까워지는 것보다는 적대적으로 보일지라도 분명하게 선을 긋는 편이 더 나았다.

<로스트 도터>(2021)

시끄럽고 무례하며 침입하는 존재. 중년의 비교문학 교수인 레다에게는 어느덧 장성한 두 딸이 있다. 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서 두 딸을 양육하기란 쉽지 않았다. 딸들은 단 한 순간도 레다를 혼자 두지 않았으니까. 요구를 들어줄 때까지 같은 말을 수백 번 반복하고, 자기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레다의 머리나 뺨을 아무렇지 않게 때리며 장난처럼 비웃어 보이고, 학술 포럼에서 발표 기회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는 중요한 연락을 받는 와중에도 레다의 몸뚱이에 매달려 자신의 온몸을 기대고 포개는 아이들. 주말만큼은 양육을 분담하기로 한 남편은 헤드셋으로 무장한 채 논문에 얼굴을 처박고 어떻게든 몰두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레다의 양쪽 귀를 다시 열어젖힌다. 헤드셋을 빼앗겨버린 레다에게 들려오는 아이들의 울음과 비명 소리.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레다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남편을 노려보며 말한다. 질식할 것 같아.

레다는 날마다 해변에서 마주치는 그리스계 대가족들 가운데,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자주 혼자가 되어버리고 마는 여성에게 점점 눈길이 간다. 피로한 얼굴로 어린 딸의 요구를 힘겹게 수행 중인 어린 엄마 니나. 젊고 빛나며 자신을 치장할 줄 아는 니나는 짙은 아이라인과 원색의 네일로 무장하고 있어도 채색이 하나도 안 된 그림처럼 명암만 짙어 보인다. 그런 니나를 레다는 조금은 알 것도 같다. 그가 지금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를. 새파란 바다를 바라보며 잠시 넋이 나갔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지경. 내리쬐는 햇빛에 온몸을 맡긴 채 그저 나른해지고만 싶은데, 그때마다 귀신같이 알아채고 금세 보채는 아이의 칭얼거림에 망망대해를 앞에 두고도 사방이 가로막힌 아주 좁은 곳에 갇혀 있는 듯한 기분. 레다는 니나를 보며 기십 년 전의 자신을 떠올린다. 오래전 일이라고 하기엔 여전히 악몽처럼 생생하기만 한 과거의 장면들 속으로 깊게 침잠한다. 질식하고 싶지 않아서, 진짜 나를 잃어버릴까 봐 발버둥 쳤던 어느 시절을. 어쩌면 어린 엄마인 니나에게도 이미 찾아왔을지 모를 시간들. 그래서 레다는 어린 딸들로부터 도망쳤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어린 딸들을 버렸던 시절. 학술 포럼에서 만난 저명한 학자는 연술 도중 레다의 연구를 상찬했다. 인정받고 싶은 사람들에게서 인정을 받는 일. 레다에게는 그것이 필요했다. 엄마라는 역할 말고, 진짜 나를 알아봐 주는 곳. 양육이라는 질릴 대로 질린 역할놀이를 관두고 레다는 그곳으로-실제 장소라기보다는 저명한 학자의 품으로-떠났다. 레다의 두 딸은 삼 년간 엄마 없이 유년 시절을 보냈다.

<로스트 도터>(2021)

여기까지. 내가 레다를 변호하기로 작정하며, 그가 어린 엄마였던 시절을 들추며 감정적인 몰입을 순탄하게 해내는 동안, 영화를 같이 본 남편은 어떤 장면들이 스쳐 갈 때마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TV 화면에 종료 창이 뜰 때까지 우리는 한참 동안 레다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다. 남편을 떠난 건 그럴 수도 있다고 쳐. 그럼 엄마의 부재를 온몸으로 견뎌냈을 딸들은?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책임을 저버린 건 납득하기 어려워. 그런 엄마의 자식이라면 너무 불쌍하잖아. 나는 왜인지 전적으로 레다의 편이 되어서 남편을 설득하기에 이르렀는데 그건 자식으로서의 입장을 철저히 외면했기에 가능한 변호였다. 물론 레다의 이해하기 어려운 몇몇 행위들은 나로서도 물음표로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니나의 딸 엘레나가 죽고 못 사는 애착 인형을 몰래 훔친 것. 마을 곳곳에 전단을 붙일 만큼 절박하게 찾고 있던 인형이었다. 그리스계 가족들의 바캉스를 망칠 만큼 지독하고 끈질기게 칭얼거리는 엘레나의 울음소리가 해변을 가득 메우는 걸 알면서도 레다는 왜 인형을 훔친 것일까? 육아로 지친 니나를 연민하면서도, 그래서 그가 다른 남자와 불륜을 저지르는 걸 눈감아 주면서도, 인형의 부재로 인해 엄마를 향한 엘레나의 애착이 더 거세지는 걸 줄곧 지켜보았으면서도.

레다의 그 고약한 면모를 나는 꽤 오래 생각할 것 같다. 지금으로서는 그럴 수도 있다, 에 가까운 입장이다. 인간은 모두 고약한 구석이 있고, 한결같지 않고 때때로 완전히 엇나가는 구석도 있고, 어느 시기에는 윤리나 상식, 책임과 의무 따위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도, 그리하여 자책과 후회가 다분해도 끝내 상대에게는 티 내지 않으려는 못된 구석이 있으니까. 그런 까닭에 나는 레다 같은 캐릭터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이 제법 흥분된다. 그 역할이 여성이고, 엄마라면 더더욱 그렇다. ‘엄마는 강하다는 훌륭한 관용적 표현에 흠집을 내고 싶지는 않지만, 그 표현이 커다란 장막처럼 엄마가 된 여성을 완전히 뒤덮어버리고 있다는 것을, 실은 그 장막 아래에 형언할 수 없는 감정과 욕망이 존재한다는 것을 때로는 까뒤집어 내보여도 괜찮지 않을까.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로스트 도터>(2021)
The Lost Daughter
OTT 왓챠, Tving
연출 매기 질렌할
출연 올리비아 콜맨, 다코타 존슨, 제시 버클리
시놉시스
그리스로 혼자 휴가를 떠난 대학 교수 레다는 딸을 가진 젊은 여자 니나를 보고 단번에 시선을 빼앗긴다. 매일 같은 해변에서 시간을 보내며 서로를 응시하던 두 사람, 갑자기 니나의 딸이 사라지고 레다는 옛 기억을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