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효신, [I am A Dreamer], 2016

3년여의 조연출 기간을 마치고 처음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의 연출을 맡았을 때, 나는 몹시 두려웠다. 내가 모든 걸 망쳐버릴까 봐. 소중한 선물을 받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린아이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부모님이 큰마음 먹고 좋은 장난감을 사줘도 언감생심 갖고 놀지도, 그렇다고 장식장에 넣어두지도 못하던 소심한 아이는 자라서도 꼭 그런 어른이 되었다. 이걸, 이 귀한 걸, 도대체 어째야 하나, 손바닥에 흐르는 땀만 자꾸 비비적거렸다.

가장 큰 걱정 중 하나는 청취자들이 신청한 노래를 내가 모르는 것이었다. 청취자도 진행자도 작가님들도 아는 좋은 노래를 내가 몰라서 제때 틀지 못하면 어쩌나, 그게 그렇게 걱정이었다. 며칠도 안 돼 그런 걱정은 사라졌다. 그런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매일 벌어지는 일이어서. 수많은 청취자가 보내오는 수많은 신청곡을 내가 다 아는 건 불가능했다. 매일 모르는 노래가 신청곡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눈에 들어오는 노래는 선곡하고, 아닌 건 한쪽에 모아두면 되었다. 찬찬히 들어보고 좋은 노래는 다음 날이나 다다음 날, 혹은 주말 방송을 녹음할 때 틀어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아주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진짜 문제는 ‘방송 시간이 비는’ 거라는 걸 몇 주쯤 지나서 알게 됐다. 프로그램이 끝나려면 5분 이상 남았는데 진행자가 딱히 할 말을 떠올리지 못할 때, 그날따라 스튜디오 밖에서 작가님들이 적당한 문자 사연을 찾는 것도 잘 안될 때, 식은땀이 흘렀다. 끝곡으로 올려둔 노래는 3분 30초, DJ가 메워야 하는 1분 30초가 영겁처럼 길었다. 조금 더 지나서는 노래를 ‘잘리지 않게’ 틀고 싶다는 욕심도 부리게 됐다. 이제 막 노래의 하이라이트가 시작되려는데 방송이 끝나 페이드아웃 되고 ‘조강지처가 좋더라~ 썬연료가 좋더라~’하는 광고가 나오면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니까, 라디오 PD에게 중요한 건 ‘좋은 노래’라기보다 ‘필요한 길이의 좋은 노래’라는 걸 알게 됐다. 이제 조금, 이 선물을 요모조모 뜯어보고 만져볼 엄두가 생겼다.

메모장에 ‘긴 노래’와 ‘짧은 노래’의 리스트를 만들어갔다. 노래를 들을 때 몇 분짜리인지 시간부터 보는 버릇이 생겼다. 2분짜리나 5분짜리 노래는 예쁜 조개껍데기를 찾은듯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십센치 <아메리카노> 2분 30초, 김동률 <취중진담> 5분 20초, 불룩해진 주머니에 손을 넣고 흐뭇해하듯 점점 길어지는 노래 목록을 들여다보면 포만감이 느껴졌다. 박효신의 앨범은 노다지였다. 5분 안팎의 노래들이 수두룩했고 신청도 많이 들어오는 가수였다. 콧노래를 부르며 노래 제목을 옮겨적던 어느 날… 문득 ‘현타’가 왔다. 내가 지금… 박효신의 신보를 들으면서 고작 노래 길이 때문에 좋아하고 있는 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박효신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Home>은 6분, <숨>은 4분 43초, <야생화>는 5분 14초이지만 ‘긴 노래 목록’에 넣지 않았다. 이 곡들을 시간이 남을 때 끝곡으로 들을 노래로 분류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고 나니 메모장을 불려가는 행위도 자연스럽게 멈춰졌다. 더 적어두지 않아도 노래 제목들이 머릿속에 제법 남아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더 이상 시간을 보며 노래를 듣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더 좋은 라디오 PD’가 될 것 같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더 좋은 라디오 PD’가 뭔지도 사실 잘 모르겠지만, 시간 맞춰 노래 트는 기술자가 아닌 건 확실했다.

박효신의 7집 앨범을 들으면 라디오에서 이 노래들이 흘러나오는 장면을 상상하게 된다. 어떤 계절일까. 어떤 사람이 듣고 있을까. 어떤 타이밍에 이 노래가 흘러야 가장 완벽한 그림이 완성될까. 내가 선곡하는 노래 한 곡으로 누군가의 인생에 멋진 순간을 만들어 줄 수 있다는 허황된 꿈을 다시금 꾸게 하는 가수, 내게는 박효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