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와 태양
일곱 살, 내 인생은 피아노가 전부였다. 시계를 정확히 읽게 될 즈음 엄마는 나를 동네에 있는 피아노 교습소에 보냈다. 유치원을 졸업하고 시간을 보낼 곳이 요원하던 차였다. 체르니 100번의 진도를 거의 다 끝냈을 무렵 피아노 선생님은 교습소에 나를 데리러 온 엄마를 붙잡고 이렇게 말했다. “지혜가 소질이 있는 것 같아요.”
소질, 얼마나 달콤한 말인가. 선생님의 말마따나 나에게는 소질이 있었다. 암보와 기술, 천재적인 해석과 표현법 같은 게 아니라 피아노와 함께하고자 하는 열망이 바로 나의 재능이었다. 방과 후 시간을 메우러 온 아이들과 달리 나는 연습용 까만 업라이트가 놓인 작은 연습실에 몇 시간이고 앉아 있을 수 있었고, 건반 한 옥타브에 채 닿지 않는 작은 손을 만회할 운지법을 빠르게 터득했으며 악보는 모국어처럼 읽었고 연습실 벽에 붙은 죽은 작곡가들의 초상화를 보며 먼 친척 같은 친근함을 느꼈다.
그때 나에게 피아노 치는 일은 연주가 아니라 스킨십과 같았다. 각각의 소리를 내는 나무 조각을 누르면 들어본 적 없는 음률이 탄생했고 그건 내가 바랐는지도 몰랐던 환희를 불러왔다. 말하자면 피아노는 나와 가장 가까운 타인이었다. 나는 스스로를 좋아하는 것처럼 피아노를 좋아했고 나 자신보다 피아노가 나를 더 잘 안다고 느꼈다. 내가 아닌 존재와 공명하는 일. 어쩌면 사랑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상태를 일곱 살에 처음 겪은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굳게 믿었던 소질이 나를 배반하고 종내에는 떠나가기까지, 나는 소질이 나에게서 멀어지는 줄도 몰랐다.
중학교 입학을 앞둔 겨울,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콩쿠르에 참가한 적이 있다. 전공은 요원한데 그 정도면 취미로 하라는 말은 어쩐지 나에게 모욕으로 들렸다. 좋아하는 일은 취미로 하면 된다고? 취미가 장난이야? 그건 내 사랑에 대한 모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날 운 좋게 상을 받고 집으로 돌아오며 나는 소질과 이별할 시간이 다가왔다는 걸 예감했다. 영원히 함께할 수 없다면 여기서 그만해야 하는 게 아닐까? 사랑하는 만큼 잘 해내지 못한다면 안 하느니만 못한 게 아닐까? 나는 소질과의 이별을 종용하는 주변 사람들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느 한쪽이 죽거나 배신해야만 완성되는 관계. 그러니까 소질을 먼저 배반한 쪽은 나였다.
어떤 소질은 봄날의 태양처럼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만 어떤 소질은 해변의 모래마냥 한 번 쥐었던 기억만으로 평생을 갈망할 수도 있다. 그때 나에게 머물렀던 소질은 모래였을까 태양이었을까. 나는 소질을 가졌던 걸까 가졌다고 믿었던 걸까? 변치 않는 사실은 내가 소질을 사랑했고 소질 또한 나를 아꼈으므로 소질과 나의 일에 대해 누구의 확인도 증명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 한동안 나는 과거의 소질이 돌아왔는지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겨우 소질이라고 생각한 무언가는 예전의 소질만큼 나에게 호의적이지도, 확신을 주지도 않았다. 나는 종종 어릴 적 나에게 머물렀던 소질이 그리웠다. 그때만큼 완벽하지도 충만하지도 않은, 시간을 허비하기만 하는 새 소질이 지긋지긋했다. 더 정확히는 소질을 사랑하는 마음이, 나를 바라봐주지 않는 소질을 원하는 내 욕망이. 그럼에도 소질이 머물길 바라며 꾸는 끝없는 꿈이.
자우림의 <꿈의 택배편>을 들었을 때 나는 그게 내가 하는 말인 줄 알았다. 꿈이나 전생, 혹은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던 머릿속 노래가 눈앞에서 재생되는 기분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으리라. 어쩐지 나의 일부인 것만 같은 장면이나 노래가 예고도 없이 찾아올 때면 속수무책으로 나는 그게(대상이 무엇이든지 간에) 전생에 오랜 싸움을 함께 한 동지처럼 느껴진다. 익히 아는 그 마음과 함께.
“꿈에서 꿈으로 마음이 전해지면 좋을 텐데.” 그렇지만 슬프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우리는 계속해서 오해를 만들어낸다. 어떤 마음은 입과 손, 눈빛으로도 전해지지 않은 채 누군가의 몸속에 갇힌 유령처럼 영원을 맴돈다. 가사의 바람처럼 우리가 서로의 마음을 꿈으로 전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쓸데없는 걱정도, 소용없는 짐작도 없이 완전한 우리가 될 텐데.
“그래서 몰랐어, 나를 향했던 안타까운 마음 따윈 하나도.” 그러나 마음을 온전히 전할 방법은 어디에도, 영원히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 노래는 내가 잃어버린 줄도 몰랐던, 소질에게 듣고 싶었던 찰나의 말이라는 걸 이제 나는 안다. 나처럼 너에게도 내가 중요했기를, 바라고 또 바랐던 여물지 않은 소망처럼. 나의 간절함을 알았다면 이렇게 쉽게 떠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수많은 갈망과 연습의 나날을 보낸 뒤에야 나는 가까스로 새로운 소질과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어떤 소질은 국적이 다른 연인처럼 나를 근본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럼에도 중요한 일은 소질의 손을 놓지 않는 각오라는 것을. 소질이 나를 바라볼 때까지. 혹은 나에게 더 이상 소질이 필요 없어질 때까지. 소질과 내가 이별하는 날까지. 소질을 떠올리지 않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이라고. 이따금 이 노래를 들을 때면 여전히 내 안에 머물고 있는 소질의 빈자리를 느낄 수 있다. 네가 거기 있었다는 것을, 영영 나를 떠났다는 것을. 그리고 계속, 그 자리가 채워지길 바란다는 것도. 이별의 슬픔이 증오와 미움, 그럼에도 놓을 수 없는 애정과 자기희생으로 연결되는 감정의 나락을 나는 다 헤아릴 수 없지만, 이 노래의 마음에 대해서는 내 속에서 꺼낸 것처럼 말할 수 있다. 이제 그것들을 들을 대상은 분명치 않지만. 내가 놓친 오래된 소망들. 그건 후회일까 슬픔일까? 머릿속에서 울리는 영원한 메아리에서 우리는 언제쯤 자유로워질까?